5화
‹ ›아버지의 서재는 늘 그렇듯 서류 냄새가 났다.
낡은 가죽과 잉크, 그리고 마른 종이가 뒤섞인 냄새였다.
창가에는 어머니가 보낸 동방 찻잎이 담긴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뚜껑을 닫아둔 지 오래인지, 은은한 향이 방 안 전체에 스며들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윤아, 연락 없이 웬일이냐."
나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 있었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표정을 보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펜도 함께 내려놓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무슨 일이야."
그 물음에, 나는 준비해둔 말들이 순서 없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희가 전해준 말, 한도진의 웃음,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쌓여온 장면들.
말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목이 막혔다.
말이 끊길 때마다 아버지는 조용히 기다렸다.
다그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나를 더 울게 만들었다.
"저는... 그 사람한테 그냥 자원이었나 봐요."
나는 그 말을 하며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5년 동안 참아온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카펫 위로 스며들었다.
숨이 가빠서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다 들었다.
중간에 끼어들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내 손이 떨릴 때마다 시선을 옮겨왔을 뿐이었다.
다 듣고 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
그 물음에 나는 대답을 고르느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제 부족함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의 얼굴이 무겁게 굳었다.
턱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서윤아."
"네."
"그건 네 부족함이 아니야."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았다.
손이 크고 단단했다.
오래전, 어릴 때 넘어질 때마다 잡아주던 그 손이었다.
그 온도가 그대로였다는 게 이상하게 서러웠다.
"네가 참아온 시간이 아깝다."
"..."
"혼자 짊어지지 마라."
그 말에 나는 다시 눈물이 났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내 편에서 명확하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가 이상했다고.
그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목에 걸려 있던 무언가를 씻어내는 것 같았다.
"이혼하고 싶어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랫동안 마음속에서만 굴리던 말이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손끝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서재 안의 시계 소리만 째깍째깍 울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아버지가 반대하실 줄 알았어요."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미안함과 자책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왜 반대를 해. 내 딸이 아픈 걸 알면서."
"그동안 도진이한테 계속 돈을 보내주셨잖아요. 저 때문에."
"그건 네가 부탁해서가 아니라, 네가 그 집에서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몇 번 두드렸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널 더 힘들게 한 것 같구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돈으로 산 침묵이, 결국 나를 더 옭아맨 셈이었다.
서재를 나서면서 나는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조금은 가벼워진 걸 느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눌 수는 있게 된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나는 어머니의 방에 들렀다.
방문을 열자 낯익은 향이 먼저 코끝에 닿았다.
유란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찻잔에 동방의 차를 따라주었다.
따뜻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찻잔을 받아드는 내 손이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 향을 맡을 때마다 겪어야 했던 시선들이 문득 떠올랐다.
동방 억양 때문에 무시당했던 시선들, 낯선 향신료 때문에 조롱받았던 자리들.
사교계 파티에서 등을 돌리던 여인들, 뒤에서 수군거리던 목소리들.
어머니는 그 모든 걸 견디며 아버지의 곁을 지켜왔다.
한 번도 티를 낸 적이 없었다.
내 앞에서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너는 나처럼 견디지 마라."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찻잔을 감싸 쥔 어머니의 손등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견디는 게 사랑인 줄 알고 살면, 나중엔 그게 사랑이었는지도 헷갈리게 돼."
나는 그 말을 가슴 깊이 눌러 담았다.
말이 없어도, 어머니의 눈빛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눈빛 안에는 후회와 안도가 함께 섞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지나며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이혼을 결심했다는 사실이 아직 낯설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확신이 완전히 마음을 놓게 해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방향은 정해진 셈이었다.
다음 날, 나는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왕도 법률원으로 향했다.
법률원 건물은 높고 차가운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었다.
발소리가 복도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곳 대기실에서, 예상치 못한 얼굴과 마주쳤다.
한도진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그것도 다른 여자의 변호사와 함께였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가 먼저 이곳에 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더군다나 낯선 여자의 변호사와 함께라니.
한도진이 나를 발견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걸린 그 익숙한 웃음이, 오늘은 유난히 낯설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