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자원이었던 아내

4화

그날 이후 며칠, 나는 서고에서도 실수를 반복했다. 필사본을 뒤집어 놓거나, 이미 확인한 페이지를 다시 확인하거나 했다.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먹물이 번진 자리를 세 번이나 다시 닦아야 했던 날도 있었다. 서고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요즘 안색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다고만 대답했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괜찮은 건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의 빛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밤, 나는 결혼 초기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한도진과 만난 건 아버지가 주최한 상단 후원 연회에서였다. 그는 몰락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예의 바르고 말솜씨가 좋았다. 키가 크고, 목소리가 낮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웃음을 가진 남자였다. 나는 그가 다른 남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서고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척은 했으니까. "고서 복원이라니, 놀랍네요. 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감탄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는 뺨이 붉어질 정도로 기뻤다.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그 말에는 이미 '여자가'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놀랍다는 말 앞에, 왜 그 단서가 붙어야 했을까.' 결혼식 날, 그는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유난히 오래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소리를 주고받았다. 나와는 짧은 인사만 나누고 곧바로 손님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는 그저 긴장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신부의 자리에 혼자 서 있던 그 순간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결혼 1년 차, 나는 여전히 왕립서고에 다니고 있었다. 한도진은 처음엔 반대하지 않았다. "당신 벌이가 있으면 집안에도 도움이 되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말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훨씬 나중이었다. '도움이 된다는 건, 결국 내가 필요해서 곁에 둔다는 뜻이었을까.' 결혼 3년 차, 시어머니가 아프셨다. 병원비가 급했다. 한도진은 내게 아버지에게 연락해달라고 했다. "당신 아버지한테 한 번만 부탁해줘. 나는 얼굴을 못 들겠어서." 그의 목소리는 미안한 듯 떨렸다. 나는 그렇게 했다. 아버지는 두 말 없이 도와주셨다. 서재에서 나오던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던 걸, 나는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로 그런 부탁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었다. 상단 지분 문제, 저택 수리비, 소라의 데뷔 비용, 사교계 모임 회비까지. 한 번은 겨울이었고, 한 번은 여름이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나는 매번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연락을 드려야 했다. 전화를 걸기 전, 나는 항상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리고 그 사이, 한도진은 점점 내게 무심해졌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즘 어떤 자료를 복원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식탁에 마주 앉아도 그는 신문을 펼쳤다. 대신 아버지의 상단 소식에는 늘 관심을 보였다. "요즘 상단 쪽 사업은 어떻게 돌아가?" 그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그때는 왜 그걸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늘 내 부족함을 먼저 생각했다. 그가 무심해지는 건 내가 매력이 없어서일 거라고,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소라에게만 다정한 건, 남매니까 당연한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가 아버지의 돈을 반기면서도 아버지를 낮춰 말하는 건, 그냥 그 사람의 말버릇일 뿐이라고 넘겼다. 식사 자리에서 그가 아버지를 두고 "장사꾼 특유의 계산속"이라고 흘리듯 말했을 때도, 나는 웃으며 넘겼다. 나는 매번 그를 이해하려 애썼다. 그를 이해하는 게 곧 내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이해하려 애쓴 적이 없었다. 내가 서고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온 날에도, 그는 왜 늦었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왜 나는 여태 참았을까.' 그 질문이 목 안에서 계속 걸려 있었다. 답은 하나였다. 나는 내가 참는 게 아니라, 노력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이런 어긋남도 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믿어왔다. 그렇게 믿어야, 내가 견뎌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을 것 같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세게 불었다. 덧창이 흔들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나무 창틀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유리창이 떨리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방 안의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침대 옆 협탁 위, 한도진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웃음이, 오늘따라 낯설게 보였다. 더는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오랜만에 아버지의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를 불렀다. 마부에게 목적지를 말할 때,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나왔다. 마차 창밖으로 왕도의 거리가 지나가는 동안,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계속 되짚어보고 있었다. 거리의 상점들, 지나가는 사람들, 익숙한 풍경들이 흐릿하게 흘러갔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문장을 만들었다가 지웠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버지, 저는……'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정원의 나무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푸르렀다. 그 평온한 풍경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서재 문 앞에 서자, 손끝이 떨렸다. 오랫동안 참아온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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