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왕립서고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발끝이 무거웠다.
밤새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여자 아니었으면 나도 지금쯤은..."
뒷말을 알 수 없어서 더 신경이 쓰였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었을 거라는 건지.
생각하면 할수록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서고에 들어서자 익숙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와 오래된 잉크, 습기가 뒤섞인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일에 집중하자. 그 말은 나랑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어.'
서고장이 내게 오래된 왕가 계보 문서 하나를 건넸다.
습기로 훼손된 부분이 많은 자료였다.
종이 귀퉁이가 갈색으로 눅어 있었고, 몇몇 글자는 이미 형체를 알 수 없이 번져 있었다.
"이번 것도 만만치 않겠어요."
서고장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일에 집중하려 했지만, 손이 자꾸 멈췄다.
펜을 쥔 손끝이 문서 위를 헤매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서 있곤 했다.
'그 여자 아니었으면.'
그 문장이 자꾸 눈앞의 글자들 위로 겹쳐졌다.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줄을 다시 읽어야 했다.
오후에 윤소희가 찾아왔다.
소희는 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지금은 궁정 재무원에서 일하며, 사교계 소식에 유난히 밝은 사람이었다.
소희가 서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문서를 덮었다.
"얼굴이 왜 그래."
소희가 앉기도 전에 물었다.
"또 그 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아니야."
소희는 미간을 좁혔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어제 소라 생일 파티에 다녀왔다며. 선물 뭐 받았어?"
"내가 아니라 소라가 받았어."
나는 짧게 대답했다.
"자수 손수건 세트. 왕도 상점가 걸로."
"그거 꽤 비싼 데 아니야? 도진 씨가 직접 골랐대?"
소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소라가 그 얘기를 몇 번이나 하더라. 오라버니가 세 시간이나 상점가를 돌았다고."
소희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너 생일은 언제였는데?"
"두 달 전."
"그때 뭐 받았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받은 게 없었다.
정확히는, 한도진이 그날 저녁 늦게 들어와 "바빠서 깜빡했다"고 한 게 전부였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는 내 눈을 보지 않았다.
소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서윤아."
소희가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됐어. 밥이나 먹자."
그날 밤부터 나는 며칠 동안 그 대비를 곱씹었다.
소라에게는 시간을 내어 상점가를 돌아다니고, 웃으며 선물을 골라주는 사람.
나에게는 세 달에 한 번씩 아버지에게 연락해달라는 말을 던지는 사람.
'가족이니까 다른 거겠지.'
'남매 사이는 원래 그런 거니까.'
나는 계속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다독일수록 이상하게 속이 더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금이 간 유리컵에 뜨거운 물을 계속 붓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쨍, 하고 갈라질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그 물을 부었다.
그 주 주말, 시어머니의 생신 자리가 있었다.
한도진 가문의 오랜 지인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저택 전체가 며칠 전부터 분주했다.
나는 준비를 도맡았다.
음식, 자리 배치, 선물까지 전부 내 몫이었다.
꽃장식을 고르는 일부터 초대 손님 명단을 확인하는 일까지, 하루 종일 발이 바닥에 닿을 틈이 없었다.
자리가 시작되고,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비단옷과 향수 냄새가 뒤섞여 공기가 무거웠다.
손님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부인 가문이 왕실 상단 후견인이시라고요? 대단하시네요."
한도진이 그 말을 받았다.
"아, 예. 뭐, 장사꾼 집안이 다 그렇죠. 억척스럽게 일해서 그렇게 됐다고들 하더군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가벼운 웃음, 아무 의미 없다는 듯한 웃음.
나는 그 웃음 사이에서 잔을 채우고 있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술병을 든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병 표면에 실금 같은 것이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얼른 병을 내려놓았다.
'억척스럽다니.'
'그게 우리 아버지고, 우리 어머니 이야기인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도, 그전에도 늘 그랬듯이.
입을 열면 무슨 말이 나올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았다.
연회가 끝난 뒤, 손님들이 하나둘 돌아가고 홀이 조용해졌다.
소라가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언니, 오라버니 말버릇이 좀 그렇죠?"
나는 놀라서 소라를 바라보았다.
소라가 그런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평소라면 오라버니 편만 들던 아이였는데.
"그냥... 늘 저러니까요."
소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 애도 알고 있었구나.'
알면서도 아무 말 못 하는 게,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혼자 남아 잔을 정리했다.
식탁 위에 놓인 시어머니의 생신 선물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도진이 몇 주 전부터 준비한 은세공 장신구였다.
포장지까지 신경 써서 고른 흔적이 보였다.
내 생일에는 없었던 정성이었다.
나는 그 상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 정도로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이었네.'
그 생각이 들자 가슴 한켠이 이상하게 시큰거렸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어머니 유란이 보낸 상자를 열었다.
동방에서 온 찻잎과 향신료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매달 이맘때쯤 이런 상자를 보내왔다.
편지는 없었지만, 상자 안 물건들만 봐도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찻잎 향을 맡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오랜만에 숨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소희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서두르는 발걸음이었고,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서윤아, 나 어제 우연히 들은 게 있는데... 너 이거 듣기 전에 마음 단단히 먹어."
소희의 목소리가 낮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서고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