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자원이었던 아내

1화

왕립서고 3층은 언제나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마른 가죽 표지와 빛바랜 잉크가 뒤섞인 냄새였다. 거기에 마른 풀 냄새 같은 방부제 향이 옅게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마음이 놓였다. 고서 복원실의 아침은 조용했다. 동료들이 출근하기 전, 나는 늘 가장 먼저 서가에 도착했다. 문을 열면 어제 말려두었던 페이지들이 나무 선반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습기를 먹은 자리는 파삭하게 말라 있었고, 곰팡이가 번질 뻔한 자리는 다행히 멈춰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손끝으로 확인했다. 낡은 필사본의 갈라진 책등을 살피고, 접힌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펴는 일이었다. 바늘로 종이 섬유를 하나씩 이어붙이듯 세심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손끝이 무뎌질 만큼 오래 해온 일이었지만, 지겹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이 복원관님, 오늘도 제일 먼저 오셨네요." 청소를 맡은 소년이 지나가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은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왕립서고에서 나는 '이서윤 복원관'으로 불렸다. 왕국 안에서 고문서 복원 기술을 인정받은 몇 안 되는 여성 중 하나였다. 동료들은 내게 조언을 구했고, 서고장은 내 판단을 신뢰했다. 어떤 문서를 먼저 손봐야 하는지, 어떤 접착제가 종이에 무리가 없는지, 내 말이 곧 결정이 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내 이름이 곧 나였다. 그러나 한도진 자작가의 대문을 넘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결혼한 지 5년째, 그 집에서 나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었다. "부인." 하인들도, 시어머니도, 남편도 나를 그렇게 불렀다. 심지어 시어머니는 내 이름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굴 때도 있었다. "부인, 오늘 저녁 식단은 정하셨나요." "부인, 손님방 이불이 낡았던데." 처음엔 예의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 한도진은 몰락한 자작가의 후계자였다. 가문의 이름은 남았지만, 재산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였다. 낡은 저택의 벽지 곳곳이 들뜬 것이 그 증거였다. 그는 자존심이 강했고, 그 자존심을 지키는 데 필요한 돈은 대부분 내 아버지, 이명헌 백작에게서 나왔다. 아버지는 왕실 어용 상단의 후견인이자 왕국 재무원 고문이었다. 한도진은 결혼 초부터 그 사실을 무척 좋아했다. 다만 좋아하는 방식이 이상했다. 그는 아버지의 돈을 반겼지만, 아버지의 출신을 은근히 낮춰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장인어른 상단 사람들은 참... 억척스럽다니까." 그가 손님들 앞에서 웃으며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웃지도 못하고 화내지도 못한 채 잔을 채우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방 안에 퍼질 때마다, 나는 손에 든 주전자가 조금 더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저녁도 비슷했다. 한도진의 여동생, 한소라가 놀러 와 있었다. 소라는 나를 볼 때마다 예의는 갖췄지만, 눈빛에는 언제나 옅은 무관심이 있었다. 나를 향한 인사는 짧았고, 시선은 금세 오빠에게로 돌아갔다. "오라버니,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소라가 상자를 열며 물었다. 동방에서 온 자수 손수건 세트였다. 비단실로 놓은 자수가 촛불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한도진이 직접 왕도 상점가를 돌아다니며 골랐다는 말을 곁에서 들었다. 가게 점원 셋을 붙잡고 한 시간 넘게 골랐다는 이야기까지도. "물론이지. 우리 소라 생일인데." 그는 웃으며 소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문가에 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생일에 그가 무언가를 준비한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기억나지 않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남매 사이니까. 오빠가 동생 챙기는 건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손끝이 이상하게 차가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 순간, 방 안의 온도가 나만 빠진 채 조금 내려간 것 같았다.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소라가 돌아간 뒤, 한도진은 서재로 들어가며 나를 불렀다. "당신 아버지한테 다시 연락해봐." 그는 서류 뭉치를 흔들며 말했다. "이번 상단 지분 건, 장인어른이 도와주시면 금방 풀릴 문제야."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 위에 찍힌 도장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상단의 문양이었다. "이번 달에만 세 번째예요." "뭐?" 그가 미간을 좁혔다. "내가 지금 그런 걸 셀 처지로 보여?"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는 늘 이겨본 적이 없었다. 목소리를 조금만 더 높여도,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상황을 뒤집었다. "됐고, 연락해." 그는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서재 문을 닫았다. 문틀이 흔들리며 먼지가 살짝 떨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복도의 등불이 유난히 어둡게 느껴졌다. 복원실의 종이 냄새가 그리웠다. 거기서는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할 줄 아는 사람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서는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집 안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애써 모른 척해왔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을 뜬눈으로 있었다. 천장의 나뭇결을 세다가, 몇 번이나 셌는지도 잊어버렸다. 그날 밤, 침실 창밖으로 마차 한 대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이어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한도진의 친구가 급한 용무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다 문득 멈춰 섰다. 목소리가 들렸다. 낮게 웃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소리였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어딘가 뒤틀린 웃음이었다. 나는 문에 손을 댄 채 숨을 낮췄다. "그 여자 아니었으면 나도 지금쯤은..."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발걸음 소리를 냈고, 목소리는 그대로 잦아들었다. 나는 문에 손을 댄 채 그대로 멈춰버렸다. 손잡이를 쥔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 문장이 끝나지 않은 채로 머릿속에 박혀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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