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제야 강해지기로 했다

5화

재시험 신청 명단이 게시판에 붙은 건 정확히 나흘 뒤였다. 나는 그 나흘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월 선생님이 챙겨준 영양액을 아껴 마시며 강화 진행률을 확인했다. 확인이라는 표현도 부족했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진행률 창을 열어봤고, 잠들기 직전에도 마지막으로 열어봤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3퍼센트. 6퍼센트. 11퍼센트. 18퍼센트.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다. 마력 순환로가 넓어진다는 게 정확히 이런 느낌일 거라고, 나는 매번 확신을 굳혀갔다. 마치 좁은 골목길이었던 혈관 속에 고속도로가 새로 뚫리는 느낌. 뭔가 흐르는 게 막히지 않고 시원하게 빠져나간다는 감각. "오늘 진행률 몇이냐?" 동구가 아침부터 궁금해서 물었다. 이 새끼는 요즘 내 진행률 확인하는 게 아침 인사보다 우선인 것 같았다. "27퍼센트." "미친, 진짜 빠르게 오르네. 야, 이거 진짜 신기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벽돌 하나 못 들던 놈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을 펴 보았다. 예전 같으면 벽돌 두 장만 들어도 팔이 후들거렸는데, 이제는 웬만한 무게를 들어도 근육에 힘이 붙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뭔가 다른 감각이 흘렀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굶주려 있던 몸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밥을 먹은 느낌. 그런 거였다. 등급 평가 재시험 날, 훈련장에는 상급 수련생들도 견학을 온다는 소식이 돌았다. 원래는 하위권 재시험에 상급생들이 몰릴 일이 없었는데, 누군가의 입방정 때문인지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당연히 김재웅도 있었다. 그놈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특유의 비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저 웃음, 저 표정, 나는 저놈의 저 표정을 볼 때마다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참는 게 일이었다. "어이, 아직도 여기 있냐? 이번에도 결시 처리될까 봐 걱정 되겠네." 주변 학생들이 눈치를 보며 웃었다. 다들 이미 결과를 정해놓은 얼굴들이었다. 저 새끼는 또 실패하겠지, 뭐 그런 얼굴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소환진 재료를 꺼냈다. 이번엔 청염정처럼 무리한 등급이 아니라, 정확히 내 순환로 용량에 맞는 중급 재료였다. 진행률 27퍼센트로 강화된 순환로라면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는 계산이 있었다. 유월 선생님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말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딱 맞는 걸 골라라. 지금 네 그릇 크기에 맞는 걸. 소환진을 그리는 손이 이번엔 흔들리지 않았다. 이 감각도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진을 그리는 순간부터 손끝이 떨리고, 마력이 제멋대로 튀어서 선이 삐뚤어지곤 했는데. 지금은 마력이 순환로를 타고 매끄럽게 흘러 들어가는 감각이 낯설면서도 짜릿했다. 물이 파이프를 따라 흐르는 것처럼, 저항이 거의 없었다. 진이 완성되자 은은한 청록빛이 피어올랐고, 그 빛 속에서 작은 형체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환 성공!" 감독 교사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누가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김재웅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싹 사라지는 걸 나는 똑똑히 봤다. 그 표정 변화가 슬로우모션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비웃음에서 어리둥절함으로, 어리둥절함에서 당혹감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환에 성공한 적 없던 내가, 첫 시도에 중급 소환수를 불러낸 거였다. "저... 저게 말이 돼?" 김재웅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이게 바로 사이다지, 씨발.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유월 선생님이 뒤쪽에서 나를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걱정과 흥미가 반씩 섞인 얼굴이었다. 저 표정, 나는 나중에서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됐지만 그 순간에는 그저 응원하는 눈빛이라고만 생각했다. 평가가 끝난 후, 나는 최상위권 성적을 받았다.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구가 뛰어와 나를 얼싸안으며 소리쳤다. "야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완전 역전이잖아! 야, 너 이거 진짜야? 꿈 아니지?" "안 꿈이야, 이 새끼야." "아니 씨발 진짜 감동이다. 너 그동안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나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웃었다. 몇 달 동안, 아니 몇 년 동안 이런 순간을 상상만 해왔는데, 실제로 겪으니까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다들 축하해준다고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갔고, 나는 그 손길 하나하나가 다 낯설었다. 하지만 그 승리감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몸에 이상한 통증을 느꼈다. 처음엔 그냥 근육통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마력을 끌어다 썼으니 당연히 아플 수 있다고. 그런데 통증의 위치가 이상했다. 근육이 아니라 뼈 속, 아니 뼈보다 더 안쪽,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어딘가가 저렸다. 마력 순환로가 강화된 대신,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무공 재질 자체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는다는 감각이 확실하게 있었다. 등가교환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이것도 마찬가지였나. [강화 진행률: 27%] [무공 재질 소모율: 4%] 무공 재질 소모율이라는 문구를 처음 본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4퍼센트. 별거 아닌 숫자처럼 보였지만,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뭔가 대가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강화가 공짜로 이루어질 리 없다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로 눈앞에 나타나니 실감이 확 달랐다. 나는 이 사실을 유월 선생님에게 다시 상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소모율 4퍼센트가 27퍼센트라는 성과보다 더 크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날 아침, 훈련장으로 향하던 나는 복도에서 낯선 시선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아카데미 학장실 소속 교사 한 명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학장실 소속이라는 표식이 옷깃에 붙어 있었는데, 그 표식을 본 순간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지만, 그 짧은 순간 나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확실히 느꼈다. 저건 그냥 지나가다 본 게 아니었다. 뭔가를 찾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확인한 눈빛이었다. 그날 오후, 김재웅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 물었다. "너 진짜 뭐냐. 재능 없다고 소문났던 놈이 갑자기 그런 소환을 한다는 게 말이 되냐?"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노력했을 뿐이야." "노력? 노력으로 그게 되냐?" 김재웅의 눈빛에 의심이 가득했다. 예전 같으면 이 순간이 그저 짜증나는 시비였겠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저 눈빛 뒤에 뭔가 다른 계산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뭔가 부정한 방법을 썼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노력이 안 되면 다른 방법이 있나?" 내가 되물었다. 김재웅은 대답 없이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자리를 떴다. 뒷모습이 예전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게 조금 위안이 됐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저 새끼가 이렇게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는데. 그날 저녁, 유월 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현우야, 학장실 쪽에서 너에 대한 질문이 나왔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떤 질문이요?" "급격한 실력 상승에 대해서. 아직은 그냥 특이한 케이스로 넘어갔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정밀 검사를 받게 될 수도 있어." 정밀 검사. 그 말이 머릿속에서 사이렌처럼 울렸다. 만약 검사에서 이 강화 시스템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유월 선생님이 말했던 위험한 실험이라는 게 정말 내 눈앞의 현실이 될 판이었다. 나는 애써 침착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검사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나도 확실히 몰라. 다만 좋은 방향은 아닐 거야. 이 시스템 자체가 아카데미 공식 커리큘럼 밖에 있는 거니까." 선생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 걱정하고 있다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27퍼센트라는 숫자와 4퍼센트라는 숫자, 그리고 정밀 검사라는 세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훈련장 구석에서 몰래 영양액을 마시고 있던 나를, 누군가가 창문 너머에서 정확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까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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