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제야 강해지기로 했다

2화

훈련장 바닥에 청염정을 올려놓고 소환진을 그리기 시작한 건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인적이 드문 그 시간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실패해도 누구도 보지 못하게, 성공해도 아무도 시비 걸지 못하게. 낮 시간엔 훈련장 구석구석까지 선배들 눈이 닿는 통에 이런 짓을 벌였다간 온갖 참견과 조롱이 따라붙을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다들 곤히 잠들었을 시간에, 아무도 없는 훈련장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은 차가웠다. 새벽 공기는 더 차가웠다. 나는 미리 준비해 온 백묵으로 바닥에 선을 긋기 시작했는데, 전생의 게임에서 봤던 소환진 패턴을 하나하나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했다. 각도, 비율, 마력 흐름의 방향까지 다 계산해서 그렸으니까. 손끝에 마력을 밀어 넣으며 진을 완성해 가는데,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 때문인지 체력 부족 때문인지 나조차 구분이 안 갔다. 요 며칠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청염정 살 돈을 마련하느라 식비까지 아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지금 멈출 수는 없었다. 소환진의 마지막 선을 그리는 순간, 청염정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됐다. 진짜 됐다. 전생의 게임 지식으로 봤을 때 이 정도 광량이면 최소 중급 소환수는 나올 각인데, 그러면 이번 평가는 물론이고 앞으로 몇 달치 걱정이 한꺼번에 해결될 판이었다. 머릿속으로 벌써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중급 소환수라면 등급 평가에서 최소 B급, 잘하면 A급도 노려볼 수 있었다. 장학금 갱신은 당연히 될 거고, 재료상 노인에게 진 빚도 금방 갚을 수 있을 거고, 어쩌면 이번 학기 내내 나를 무시하던 동기들 표정까지 바꿔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빛이 갑자기 색을 바꿨다.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붉은색에서 다시 어두운 검붉은색으로. 이건 게임에서도 안 배운 패턴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확 돋았다. 마력 역류라는 재료상 노인의 말이 그제야 머릿속을 스쳤다. 씨발, 진짜!! 나는 서둘러 진을 해제하려 손을 뻗었는데, 그 손이 진에 닿는 순간 강렬한 충격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뼈마디가 저릿저릿하고 시야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마력이 역류하고 있었다. 몸속의 마력 순환로가 원체 좁아서 밀려드는 마력을 감당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막혀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갑자기 느려지는 게, 이게 죽는 감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아, 조졌다. 정말로 조졌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청염정이 마지막으로 검붉은 빛을 한 번 크게 터뜨렸던 것 같은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정신이 든 건 익숙한 천장을 보면서였다. 새하얀 의무실 천장, 소독약 냄새,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 눈꺼풀이 천 근처럼 무거웠다. 팔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는데 저마다 다른 시차를 두고 저릿저릿한 느낌이 훑고 지나갔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고, 입안에서는 쇠 맛 같은 게 느껴졌다. "정신이 들었니?" 유월 선생님이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눈을 깜빡였다. 여자 선생님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서 보인 게 언제였더라,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마력 역류로 하루 종일 의식을 잃었어. 재료 등급이 너한테는 너무 높았던 것 같더구나." 목소리에 화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냥 걱정만 있었다. 그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혼내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저렇게 담담하게 걱정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배로 늘었다. "제가... 얼마나 잤어요?" "열두 시간쯤 됐지." 열두 시간. 그 사이에 등급 평가가 이미 끝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재산을 다 쏟아붓고, 몸까지 망가지고,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실패가 있을까 싶었다. 게임할 때는 이런 시나리오가 나오면 로드를 하면 그만이었는데, 지금 이건 현실이라 되돌릴 수 없다는 게 뼈저리게 다가왔다. "등급 평가는요?" "결시 처리됐어. 재시험 기회는 며칠 후에 다시 줄게." 며칠 후. 그 말이 나에게는 사형 집행일 연장 통지서처럼 들렸다. 장학금은 끊겼을 게 뻔하고, 그 며칠도 버틸 방법이 없는데, 재시험 기회가 무슨 의미가 있나. 당장 이번 달 하숙비도 어떻게 낼지 막막한데 며칠 후라니. 머릿속으로 숫자들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번 달 생활비 통장 잔액, 청염정 사느라 빌린 돈, 재시험까지 버텨야 할 날짜. 하나같이 마이너스였다. 마이너스, 마이너스, 마이너스. "선생님, 저 진짜 재능 없나 봐요." 나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스스로도 이게 독백인지 대사인지 구분이 안 됐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는데, 열두 시간을 누워 있었던 성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서러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재능이 없다고 말하기엔,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 한 것 같은데." 유월 선생님이 옆 테이블에서 뭔가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병끼리 부딪히는 맑은 소리, 그리고 뭔가를 따르는 소리. "이거 마시고 좀 더 쉬어. 회복에 도움이 될 거야." 투명한 병에 담긴 연한 초록빛 액체였다. 병을 받아 들었을 때 손끝에 닿는 유리의 냉기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 들고 별생각 없이 목구멍으로 넘겼는데, 맛은 밍밍했고 향은 풀냄새 비슷했다. 씹을 것도 없이 그냥 미끄덕하게 넘어가는 액체였는데, 삼키는 순간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서늘한 감각이 한 줄로 이어졌다. 삼키고 나서 몇 초쯤 지났을까, 배 속 깊은 곳에서 뭔가 이상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그건 마력 역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냥 뭔가 정렬되는 느낌. 몸속에 흩어져 있던 무언가가 한 줄로 줄지어 서는 듯한, 설명하기 힘든 정돈감이었다. 눈앞이 순간적으로 어질거리며 시야 한쪽에 낯선 글자들이 반짝, 하고 스쳐 지나갔다. "방금... 뭐였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나려다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몸이 아직 회복 안 됐다는 걸 잊고 있었다. 등이 침대 매트리스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괜찮니?" 유월 선생님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보려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 손길이 닿기 전에 다시 시야 한쪽을 살폈다. 이미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히 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야 한쪽에 떠올랐던 그 문자들. 게임에서나 볼 법한 상태창 같은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정말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 유월 선생님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력 역류 때와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이건 두려움이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기대감 비슷한 것이었다. 만약 방금 그게 진짜였다면. 만약 저 초록빛 액체가 단순한 회복약이 아니라 뭔가 다른 작용을 한 거라면. 나는 유월 선생님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정말로 내가 아는 그것이었는지. "괜찮아요, 선생님.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요." 거짓말이었다.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는 걸 유월 선생님이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시야 한쪽 구석에는 여전히 방금 본 문자들의 잔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몰랐다. 그 짧은 섬광 하나가, 앞으로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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