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지는 건 몸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서였다. 정확히는 위장이 등가죽에 붙어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수준이었는데, 이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서 이제는 몸이 알람보다 먼저 반응했다. 아카데미 기숙사 3층, 창문도 제대로 안 닫혀서 겨울이면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이 방구석에서, 나는 매일 아침 똑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도 버텨야 한다는 생각. 그거 하나 붙잡고 눈을 뜨는 삶이라니, 전생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전생에 나는 한국에서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던 백수였다. 유일한 자랑거리라면 던전앤파이터 만렙을 세 캐릭터나 찍었다는 것뿐이었고, 죽는 순간도 딱히 극적이지 않았다. 새벽에 편의점 삼각김밥 사러 나갔다가 신호 무시한 트럭에 치였으니, 뭐, 흔한 죽음이었다. 눈을 떴을 때 이세계였고, 그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 이거 회귀물이나 환생물에서 보던 그 클리셰다, 나도 이제 먼치킨 되는 건가 싶어서. 그 기대는 정확히 한 달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게임 지식이 실전에서는 하나도 안 먹힌다는 사실을, 나는 뼈저리게, 그것도 아주 굴욕적인 방식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이름은 도현우, 나이는 열여덟, 신분은 고아, 직업은 소환사. 여기까지 들으면 뭔가 있어 보이는 설정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흉수라는 재앙급 괴물들이 인류의 구할을 잡아먹은 이 세계에서, 나머지 일할을 지켜내겠다고 세운 게 이 아카데미였고, 나는 그 아카데미의 최하위권 소환사 수련생이었다. 소환수 한 마리 제대로 못 부르는 소환사라니, 이건 거의 총 없는 사수 아니냐 씨발. 아니 총알 없는 사수도 아니고, 총 자체가 없는 사수였다. 동기들은 벌써 중급 소환수 하나씩은 부려먹고 다니는데, 나는 아직도 소환진 그리다가 마력이 새서 도중에 흩어지기 일쑤였다.
등록금이며 생활비며 뭐 하나 제대로 지원되는 게 없어서, 수업이 끝나면 나는 곧장 아카데미 외곽 공사장으로 뛰어가야 했다.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개는 게 내 오후 일과였다. 소환사가 벽돌을 나른다는 게 웃기긴 한데, 웃을 기운도 없었다. 손바닥은 이미 굳은살로 딱딱해졌고, 팔뚝은 가늘어서 벽돌 두 장을 겹쳐 들면 후들거렸다. 감독관 아저씨는 나만 보면 "야, 그거밖에 못 드냐"고 혀를 찼는데, 그 말 들을 때마다 속으로 대답했다. 아저씨, 저 소환사예요, 근력 스탯 찍은 애가 아니라고요. 물론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시급 깎이면 그게 더 손해였으니까.
"현우야, 너 오늘도 공사장 가냐?" 룸메이트 박동구가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물었다. 동글동글한 몸매에 볼살까지 통통한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묘하게 위안을 받았는데, 왜냐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를 놀리지 않고 진짜로 걱정해주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어. 오늘은 야간까지 뛰어야 돼." "몸도 안 좋은데 그렇게 무리하면 어쩌냐." "안 하면 굶어 죽어." "그래도 좀 쉬어가면서 해. 너 저번 주에도 계단에서 헛디뎌서 넘어졌잖아." "그건 계단이 잘못한 거고." 동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한숨에는 이 세계 전체의 무게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너 그러다 진짜 골로 간다니까." "골로 가기 전에 등급 평가가 먼저 골로 갈 것 같은데." 내가 히죽 웃으며 대꾸하자 동구는 더 이상 말을 안 했다. 그냥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저놈도 나만큼이나 걱정이 많은 놈이라서, 저러다 또 밤새 잠 못 자고 뒤척이겠지.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몸이 정말로 약했다. 소환사 계열 중에서도 하위 등급, 마력 순환이 원체 느려서 남들 절반의 시간을 들여도 소환진 하나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마력을 끌어올리려고만 하면 손끝부터 저려오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려서, 다른 애들이 오 분이면 끝내는 소환진을 나는 삼십 분씩 붙잡고 있어도 완성을 못 했다. 담당 교사인 유월 선생님이 수업 시간마다 나를 따로 붙잡고 봐주셨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건 감사함과 동시에 자괴감이었다. 저렇게 좋은 사람이 왜 나 같은 놈한테 시간을 낭비하나 싶어서.
유월 선생님은 온화한 인상에 늘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여성 교사였는데, 신분이나 재능으로 학생을 가르지 않는다는 소문이 아카데미 전체에 퍼져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나 같은 밑바닥 수련생한테도 똑같은 온도로 대해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현우 학생, 마력 순환이 느린 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릇의 문제예요. 그릇은 천천히 커지는 거고." 선생님은 늘 이런 식으로 말해줬는데,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릇이 커지기 전에 제가 먼저 굶어 죽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것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전생의 기억 속 어떤 인연들보다도, 이상하게 유월 선생님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게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몰랐다.
하지만 감정이야 뭐가 됐든 현실은 냉정했다. 나는 이번 달 등급 평가에서 또 최하위를 받으면 장학금이 끊긴다는 공고를 보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게시판 앞에 서서 그 공고문을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혹시 오타이길 바라면서. 오타가 아니었다. 장학금이 끊기면 기숙사도 못 다니고, 기숙사를 못 다니면 아카데미도 나가야 하고, 아카데미를 나가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흉수가 활개치는 바깥세상으로 던져지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게시판을 노려보고 있는데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른침을 삼켰는데 목구멍이 까끌까끌했다.
"이번 평가, 진짜 승부수 던져야 될 것 같아." 나는 동구에게 말했다. "어떻게?" "내 전 재산 걸고 소환진 재료 사서, 이번 주말에 진짜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 동구가 눈을 크게 떴다. "야, 그거 잘못되면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냐? 마력 역류 나면 사람 죽는다고 들었는데." "안 하면 어차피 큰일 나." 나는 웃었는데, 그 웃음이 장례식장 상주 얼굴에 가까웠을 거다. 동구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 자기가 뭘 더 말할 수 있겠나 싶었을 거다.
전 재산이라고 해봐야 공사장에서 몇 달 동안 안 쓰고 모은 돈, 딱 그거 하나였다. 밥 대신 물로 배를 채우면서 모은 돈, 겨울에도 담요 하나로 버티면서 모은 돈. 소환진 재료 중에서도 최상급이라는 청염정 하나를 사려면 그 돈을 전부 쏟아야 했는데, 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 돈을 들고 재료상으로 향했다. 도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냥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이, 등 뒤에서 계속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재료상 노인은 청염정을 건네며 딱 한마디만 했다. "이거, 재능 없는 애들은 쓰다가 마력 역류로 골로 가는 경우도 있어." 그러고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덧붙였다. "학생은 재능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도 살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웃으면서 돈을 내밀었다. 어차피 이대로도 골로 가는 거, 뭐가 다르냐 싶어서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청염정을 손에 쥐었을 때, 그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왔다. 이 조그만 돌덩이 하나가 내 몇 달치 노동의 전부라는 게, 웃기게도 실감이 안 났다.
그날 밤, 기숙사 뒤편 훈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던 것을, 나는 아직 몰랐다. 청염정을 품에 넣고 걷는 그 짧은 길이,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뒤틀어놓을지도, 나는 그때까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