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제야 강해지기로 했다

4화

의무실에서 나온 지 사흘 만이었다. 나는 몸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로 기숙사 복도를 걸어 들어왔는데, 손에는 유월 선생님이 몰래 챙겨준 최하급 영양액 세 병이 들려 있었다. 병목을 감싼 종이 포장에는 아카데미 문양이 찍혀 있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외부 유출 금지"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나는 그걸 보는 순간부터 이미 손끝이 근질거렸다. 방문을 열자 룸메이트 박동구가 침대에 널브러진 채로 만화책을 읽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고는 반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 살아있었네? 죽은 줄 알았다." "죽을 뻔은 했지." "뻔했다는 건 결국 안 죽었다는 소리네. 다행이다, 인마." 나는 대답 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병을 하나씩 꺼내 침대 시트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세 개의 작은 유리병이 창문에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을 받아 뿌옇게 빛났다. 나는 그걸 손끝으로 툭툭 건드려보고, 살짝 흔들어보고,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동구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뭐냐? 술이냐?" "영양액이야. 회복용." "근데 왜 그렇게 애지중지 만지고 있어. 그거 무슨 보물이라도 되냐?" 보물. 그 단어가 웃기게도 정확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동구에게 말해야 하나. 이 녀석은 입이 좀 가볍긴 한데, 그래도 지금까지 나를 배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시험 답안을 베껴줬을 때 고맙다며 밥까지 사준 놈이었다. "동구야, 너 나 믿냐?" "뭔 소리야 갑자기. 당연히 믿지." "진짜 이상한 얘기 하나 해도 안 놀랄 자신 있어?" 동구가 만화책을 덮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이 반짝거렸다. "야, 궁금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나 이런 거 진짜 좋아한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최대한 압축해서 설명했다. 마력 역류로 정신을 잃었던 순간, 의무실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의 기분, 그리고 그 이후로 눈앞에 뜨기 시작한 이상한 문자들까지. 처음엔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동구는 처음엔 반쯤 웃으면서 듣다가, 내가 상태창 문구를 그대로 읊는 부분에서는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만화책을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그거 진짜냐?"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겠냐." "미친, 그럼 너 진짜 각성한 거잖아." 동구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온 그의 얼굴은 이미 반쪽쯤 흥분한 아이돌 팬 같았다. "근데 이게 진짜인지 확인해봐야 되는데, 혼자 하기엔 좀 무서워서." "내가 도와줄게. 뭐부터 하면 되냐?" 나는 병 하나를 꺼내 들고 설명했다. "이걸 마셨을 때 강화 진행률이 오르는 걸 봤어. 근데 이게 나한테만 적용되는 건지, 아니면 이 액체 자체가 특별한 건지 확인해야 돼. 네가 마셔봐줘." 동구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병을 받아 들었다. 병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서 이리저리 돌려보고,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까지 했다. "이거 마셔도 안 죽는 거지?" "의무실에서 회복용으로 지급하는 거야. 안 죽어." "혹시 부작용 같은 거 있으면 어떡하냐. 뭔가 뿔이 나거나, 꼬리가 생기거나." "그럴 확률이면 내가 먼저 뿔 났겠다." 동구가 눈을 질끈 감고 벌컥 들이켰다.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방 안의 시계 초침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다. "뭐 느껴지는 거 있어?" "음... 딱히 없는데." 동구가 고개를 저으며 입가를 훔쳤다. "그냥 좀 씁쓸한 맛? 약 먹는 느낌이야." 나는 조금 실망했지만, 동시에 이게 의미하는 게 뭔지 감이 왔다. 이 능력이 나한테만 적용된다는 것. 내가 이걸 마셨을 때만 강화 시스템이 반응했다는 것.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도 묘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 이번엔 내가 마셔볼게." 나는 두 번째 병을 꺼내 들고 삼켰다.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배 속에서 익숙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마치 몸속에서 작은 물살이 역류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익숙한 문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영양 흡수 감지: 강화 재료 등급 - 하급] [강화 가능 부위: 신체 마력 순환로] [강화 진행률: 6%] "됐다! 진행률이 3에서 6으로 올랐어!" 나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손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이건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명치를 뚫고 지나갔다. 동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야 근데 그거 눈에만 뜨는 거지? 나도 좀 보고 싶은데." 그가 내 눈앞 허공을 손으로 휘저어 봤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젠장, 나만 안 보이네." "내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아." 나는 확신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첫 번째, 마력 역류로 각성한 게 우연이 아니었고. 두 번째, 영양액을 마신 순간 문자가 떴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고. 세 번째, 동구가 마셨을 때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영양액을 마실 때마다 강화 진행률이라는 수치가 오르고 있었다. 이게 계속 쌓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력 순환로가 강화된다면, 그 무거운 소환진도 남들만큼 빠르게 그려낼 수 있게 될까. 늘 손목이 후들거려서 마무리도 못 하고 주저앉던 그 지긋지긋한 소환진을, 이번엔 제대로. "동구야, 이거 우리 둘만 아는 걸로 하자." "당연하지. 근데 이거 아카데미에서 알면 난리 나는 거 아니냐?" 동구의 말에 나는 유월 선생님이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각성자를 특별 관리하려는 파벌. 위험한 실험. 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이건 절대 알려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되뇌던 그 표정.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근데 동구야, 이번 학기 등급 평가가 재시험으로 밀렸잖아. 이거 잘 활용하면 다음 재시험에서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아." 동구의 눈이 반짝였다. 만화책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야 그러면 그 재수 없는 선배 놈, 김재웅이 새끼 코를 확 눌러버릴 수 있는 거 아니야?" 김재웅. 그 이름을 듣자 뱃속에서 뭔가가 뒤틀렸다. 나를 매번 실력 없는 놈이라며 모욕하던 상급 수련생. 이번에도 등급 평가 소식이 퍼지자 복도에서 나를 붙잡고 "너 같은 놈이 무슨 각성을 하겠냐"며 낄낄대던 놈이었다. 그때 주변에 있던 애들도 같이 웃었던 게,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 얼굴이 떠오르자 손끝이 근질거렸다. "동구야, 나 이번에 그 새끼한테 한 번 붙어보고 싶어." 내 말에 동구가 씨익 웃었다. 눈에 이미 사이다를 미리 마신 사람처럼 시원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드디어 사이다 타임이 오는 건가." 나는 아직 진행률이 6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 퍼센트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영양액을 마셔야 할지, 그마저도 몇 달이 걸릴지 감히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속도라면 며칠 안에 뭔가 확실한 변화가 생길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이 될지는, 아직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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