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제야 강해지기로 했다

3화

그날 밤, 나는 의무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밤을 새다시피 했다. 낮에 본 그 글자들이 진짜였는지 헛것이었는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마력 역류로 뇌가 망가진 걸까. 그런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확실한 느낌도 남아 있었다. 분명히 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리판 위에 글씨를 새긴 듯한 그 선명함은 절대 착각으로 넘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천장의 얼룩을 세다가, 창밖에서 새어드는 달빛의 각도가 바뀌는 걸 세다가, 결국 나는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새벽을 맞았다. 머릿속은 온통 하나의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거, 정말 상태창이었을까. 전생에 게임을 그렇게 많이 했으면서도, 이런 판타지 세계에서 진짜 게임 시스템 같은 게 뜬다는 걸 곧이곧대로 믿기엔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이런 전개는 소설에나 나오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내 눈으로 직접 본 걸 어떻게 부정하나. 강화 재료 등급 - 하급. 강화 가능 부위 - 신체 마력 순환로. 강화 진행률 - 3퍼센트. 숫자 하나하나가 눈꺼풀 뒤에 각인되어 있었다. 자꾸 되새길수록 진짜라는 확신이 짙어졌다. 다음 날 아침, 유월 선생님이 다시 초록빛 영양액을 들고 왔을 때, 나는 이번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병목을 쥔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유리병이 미끈거렸다. "천천히 마셔."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정했지만, 나는 그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그 밍밍한 액체가 위장에 닿는 순간, 배 속에서 다시 그 낯선 감각이 피어올랐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뭔가 간질거리는 듯한 이물감이 위장 벽을 타고 번져나가는 감각. 이번엔 놓치지 않았다. 시야 정면에, 마치 유리판 위에 글씨를 새긴 것처럼 문자들이 떠올랐다. [영양 흡수 감지: 강화 재료 등급 - 하급] [강화 가능 부위: 신체 마력 순환로] [강화 진행률: 3%]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떨리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손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게임 유저였으니 이 형식이 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건 상태창이었다. 강화 시스템, 던파에서 장비 강화할 때 뜨는 그 창이랑 똑같은 구조였다. 진행률 게이지, 등급 표기, 부위 지정. 심지어 폰트 느낌까지 게임에서 본 것과 흡사했다. 미친. 진짜 미친. 이게 실화냐. "현우야?" 유월 선생님이 내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또 어디 아프니?" 나는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선생님, 저... 이상한 걸 봤어요." "이상한 거?" "영양액 마실 때마다 눈앞에 글자가 떠요. 강화, 진행률, 그런 거요." 말을 뱉는 순간 스스로도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미친놈처럼 보일 게 뻔했다. 정신병자가 여기 하나 더 늘었다고 소문나도 할 말이 없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유월 선생님의 표정이 예상과 달랐다. 놀라움과 흥미가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커지는 게 보였다. "그게 정말이니?"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진짜로 봤어요." "어떤 글자였는데, 정확하게." 나는 방금 본 문구를 그대로 읊었다. 영양 흡수 감지, 강화 재료 등급, 강화 가능 부위, 강화 진행률. 한 글자도 빼놓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말했다. 선생님이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의무실 안에는 정적만 흘렀다. 창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그런 종류의 각성은... 아주 오래전에 전설로만 전해지는 능력이야." "각성이요?" "소환사 계열 중에서도 극히 희귀하게, 외부 물질을 흡수해서 신체 능력을 직접 강화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대부분은 실체 없는 전설이라고 치부됐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게 전설급 능력이라고? 소환사로서 밑바닥에서 헤매던 내가 이런 걸 각성했다는 게 말이 되나. 밑바닥, 밑바닥, 밑바닥. 입학 이후 내내 붙어 다니던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소환진 하나 제대로 못 그려서 교관들한테 비웃음 사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이제 와서 전설급 각성자라고? 근데 동시에 묘한 확신이 들었다. 전생에서도 나는 이런 걸 알아봤다. 게임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본 구조. 강화, 진행률, 등급. 이건 우연이 아니라 뭔가 시스템적인 규칙이 있는 게 분명했다. "선생님,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겠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지 못했다. 유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카데미 안에는 각성자를 특별 관리하려는 파벌도 있고, 위험한 실험에 끌려갈 수도 있으니까." "실험이요?" "각성자로 판명되면 학원 상부에 즉시 보고하도록 되어 있어. 그리고 그 이후엔... 네 의사와 무관하게 여러 곳에서 관심을 받게 될 거야. 좋은 의미로만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고." 그 말에 나는 안도했다. 최소한 이 사람은 내 편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선생님의 눈빛엔 거짓이 섞여 있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보였다. "그럼... 저 이거, 시험해봐도 될까요?" "뭘 시험한다는 거니?" "이게 재현 가능한지, 정말 확실한지. 어쩌면 조건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특정 물질에만 반응하는 건지, 아니면 아무거나 다 되는 건지." 전생의 습관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왔다. 게임할 때도 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발견하면 조건을 하나씩 좁혀가며 파고들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유월 선생님이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옆에 놓인 영양액 병을 하나 더 꺼냈다. "이건 학원에서 회복용으로 지급하는 최하급 영양액이야. 몇 병 더 줄 수 있어. 조심스럽게 확인해보자." 선생님은 서랍을 열어 비슷한 병 세 개를 더 꺼내 탁자 위에 나란히 세웠다. 초록빛 액체가 병 안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병을 받아 든 순간, 나는 이게 내 인생을 바꿀 열쇠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다. 이게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방법이다. 하지만 확신과 동시에 불안도 함께 밀려왔다. 이 능력이 아카데미 규칙에 어긋나는 건 아닐까. 유월 선생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걸 눈치채면 어떻게 될까. 만약 이게 정말로 특별 관리 대상이 되는 능력이라면, 나는 그 순간부터 내 의지대로 살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 머릿속에서 온갖 시나리오가 뒤엉켜 돌아갔다. 최악의 경우 실험체로 끌려가는 그림까지 떠올랐다. 침착해, 침착해.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선생님, 혹시... 예전에 이런 능력을 각성했던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기록이 많지 않아. 대부분 전설처럼 짧게 언급만 되고 끊겨. 아마 신중하게 숨기고 살았을 확률이 높아." 숨기고 살았다. 그 말이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의무실 문 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가 멀어져 갔다. 순간 나는 그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의 걸음인지, 아니면 방금 나눈 대화를 엿들은 누군가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발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그다지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누구든 이상하게 여길 만큼 급하게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때는 그저 넘겨버리고 말았다. 유월 선생님도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고, 나 역시 손에 쥔 영양액 병에 온 신경이 쏠려 있어 그 발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내가 이 능력을 감추고 살아가려는 계획의 첫 균열이 될 줄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