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림받은 몸인데 헌터라니

5화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옆으로 몸을 던지자 등 뒤에서 벽이 통째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뺨을 스치는 파편 하나가 살갗을 얕게 긋고 지나갔다. 뜨끈한 감각이 번졌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미친, 진짜 미친···." 존댓말이 나올 여유가 없었다. 굴러 일어나면서 뒤를 돌아보니, 슬라임 변이체가 통로 벽 절반을 뭉개놓은 채 다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몸통은 사람 키의 두 배쯤 됐고, 안쪽으로 뭔가 시커먼 것이 소용돌이처럼 돌고 있었다. 저게 원래 E급 슬라임에 있어야 할 무늬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 수 있었다. 접수처에서 받은 자료 사진에는 저런 게 없었다. [네 안의 것이, 낯이 익구나.]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몬스터는 나를 노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이도현의 잔재를 노리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진동처럼 뼈를 타고 울렸다. '저건··· 오래된··· 존재예요···.' 잔재의 목소리가 다시 뭉개졌다. 평소의 능글맞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뭔가에 억눌린 듯한 파편만 남아 있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말을 제대로 못 잇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평소엔 실없는 소리로 사람 속을 긁던 게, 지금은 겁먹은 어린애처럼 더듬거리고 있었다. '저 던전에··· 들어오면··· 안 됐는데···.' "그 말을 지금 하면 어쩌라는 거야?" 내가 소리 내어 쏘아붙였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변이체가 다시 돌진했다. 좁은 통로에서 그 덩치를 피할 공간이 없었다. 계산할 시간이 없었다. 그냥 몸을 던지는 수밖에. 창을 앞으로 내밀며 바닥을 굴렀다. 창끝이 변이체의 표면을 스쳤지만, 반투명한 몸에 흠집도 못 냈다. 마치 물속에 창을 찔러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신 그 반응으로 변이체의 관심이 잠깐 흐트러졌고, 그 틈에 통로 옆으로 튀어 들어갔다. 좁은 옆길이었다. 원래 있던 슬라임들의 서식 구역인 듯했다. 벽면에는 말라붙은 점액질 자국이 얼룩덜룩 남아 있었고, 발밑에서는 뭔가 물컹한 게 밟혔다.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았다. 몸을 낮추고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던전 특유의 습하고 비릿한 공기가 폐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이거로 시간을 벌 수는 있는데··· 오래는··· 못 버텨요···.' 잔재의 말이 맞았다. 변이체는 곧 옆길을 찾아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파괴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마치 시계처럼 정확한 간격이었고, 그 규칙성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지능이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숨이 가빠지고 손끝이 얼어붙는 감각이 들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처럼 뛰었다. 회사원 시절엔 이런 물리적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최대치라고 해봐야 상사 앞에서 보고서 발표하는 정도였다. 그때도 손이 떨리긴 했지만, 지금 떨리는 손과는 종류가 다른 떨림이었다. 지금은 명백히 목숨이 걸려 있었다. '도망칠 곳이··· 저 안쪽에···.' "그다음은? 막다른 길이면 어쩔 건데." '그럼··· 죽는 거죠···.' "그게 지금 위로냐?" 대답이 없었다. 잔재도 딱히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협회 비상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화면 상단의 안테나 표시가 텅 비어 있는 걸 보는 순간, 손끝의 냉기가 한층 더해졌다. 게이트 안쪽은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구역이라는 걸, 이도현의 기억이 뒤늦게 알려줬다. 알았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지, 지금 이 타이밍에 알려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몇 번을 더 눌러봐도 화면에는 통화 실패라는 문구만 떴다. 이 좁은 통로 안에서, 나 혼자,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한 셈이었다.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코앞까지 왔다. 파편이 발치까지 튀었다. 도망칠 곳이 더는 없었다. 등 뒤로 손을 짚어봤지만 그 뒤는 축축한 흙벽뿐이었다. 변이체가 옆길의 마지막 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나. 회사에서 잘리고 이상한 몸에 들어와서, 이런 습기 가득한 던전 구석에서 슬라임한테 깔려서. 그런데 예상했던 충격이 오지 않았다. 대신 낮고 굵은 남자 목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이야, 이런 게 여기 있었네." 눈을 뜨자 변이체가 통째로 얼어붙어 있었다. 정확히는, 몸 절반이 반투명한 서리로 덮인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방금까지 나를 짓눌러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것이, 지금은 거대한 빙과류처럼 통로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캐주얼한 코트 차림에, 표정은 마치 산책 나온 사람처럼 태평했다. 박정우였다. 협회 접수 창구에서 봤던 그 사무적인 얼굴 그대로였는데, 지금 손끝에서는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하얀 서리 입자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접수원이 이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류철 넘기던 그 손으로 저런 걸 하다니, 이건 뭐 은행 창구 직원이 알고 보니 특수부대원이었다는 소리랑 뭐가 다른가. "박··· 박정우 씨?"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방금까지 죽음을 각오했던 몸이 아직 그 사실을 못 따라잡고 있었다. "놀랍죠? 나도 여기서 이런 걸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박정우가 손을 가볍게 휘젓자 얼어붙은 변이체의 몸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쩌엉,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커졌다. 그 소리가 유리병 깨지는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육중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저릿했다. [···네놈은···.] 변이체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정우가 다시 손을 뻗었고 변이체의 몸이 통째로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반투명한 파편이 바닥에 흩어졌다. 방금까지 나를 죽이려던 존재가 저렇게 순식간에, 아무 저항도 없이 부서지는 걸 보니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적막이 흘렀다. 숨소리만 통로에 울렸다. 내 숨소리였다. "E급 슬라임 정리 의뢰라고 들었는데." 박정우가 파편을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 발끝에서 파편 하나가 다시 서리처럼 하얗게 얼어붙었다. "저건 좀 심하게 오버스펙이네요. 자료에는 없었을 텐데." "어떻게 여기 계신 거예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려서 벽에 손을 짚고서야 겨우 일어섰다. "접수 마감하고 순찰 겸 왔다가, 통신 끊긴 신호가 이쪽에서 잡혀서요." 너무 태연한 설명이었다. 접수 담당자가 등급 미상의 몬스터를 손짓 몇 번으로 부숴버리는 게 정상일 리 없었다. 서류에 도장 찍던 사람이 몬스터를 얼려 죽이는 걸 취미처럼 얘기하는 것도 이상했다. 이 사람은 그냥 접수원이 아니었다. '저 사람이··· 저걸···.' 잔재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해졌다. 마치 위협이 사라지자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목소리에서 아까의 겁먹은 기색은 사라지고, 대신 뭔가 곱씹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뭔데, 저 사람 아는 사람이야?" '모르겠어요··· 근데··· 익숙한··· 기운이었어요···.' 익숙하다는 말이 뭔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잔재는 또 입을 닫아버렸다. 원래도 결정적인 순간엔 늘 이런 식이었다. "신세 진 거네요, 이도현 씨." 박정우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런 건 공짜로 안 도와드리는데. 나중에 뭐 하나 부탁드려도 되죠?"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말투에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게 느껴졌다. 손을 잡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잡지 않는다고 해서 이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손을 마주 잡았다. 손바닥에서 아직 남은 냉기가 스며들어 소름이 돋았다. "뭐, 뭘 부탁하실 건데요." "글쎄요, 그건 나중에 생각해두죠. 지금 정하면 재미없잖아요." 이 사람 말투가 원래 이랬나. 접수처에서는 딱딱하게 서류 절차만 안내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어느 쪽이 진짜 얼굴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방금 죽을 뻔한 목숨을 건졌고, 그 대가로 뭔가를 빚졌다. 얼마짜리 빚인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이 세계에서 공짜로 목숨을 구해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 정도는, 짧은 경험으로도 배운 뒤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갑니다. 나머지 정리는 알아서 하실 거죠?" 박정우가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방금까지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가볍게 떠나는 것도 이상했다. 마치 편의점에서 물건 하나 사고 나가는 사람처럼. 그리고 부서진 파편들 사이에서,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조각 하나가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만 그걸 본 것 같았다. 파편은 손톱만 한 크기였는데, 표면에 아까 봤던 그 검은 소용돌이 무늬가 실낱처럼 남아 있었다. 그게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단순히 잔열 같은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다가가서 확인해볼까 하다가, 발이 먼저 뒤로 물러섰다. '저거··· 건드리지···.' 잔재의 목소리가 끊겼다. 이번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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