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림받은 몸인데 헌터라니

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퇴직금 정산은 끝났으려나 하는 거였다. 죽음 앞에서도 정산이 걱정되는 인간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지간히 지긋지긋한 팔자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곧 오십을 바라보던 나이에 명예퇴직 통보를 받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쪼개 써야 할지 계산기를 두드리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으니까. 퇴직금에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을 더하고, 거기서 대출 잔액을 빼고, 남는 돈으로 몇 년을 버틸 수 있을지 소수점까지 따져보던 그 밤. 야근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감았던 것 같기도 하고, 지하철 승강장에서 발을 헛디뎠던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죽음이라는 게 그렇게 흐릿하게 오는 건지도 몰랐다. 극적인 순간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도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 화면이 꺼지듯 끊겼다. 천장이 낯설었다. 벽지가 누렇게 뜬 원룸, 곰팡이 자국이 지도처럼 퍼진 구석, 창문 밖으로 들리는 사이렌 소리. 방은 작았고 냄새는 퀴퀴했다. 이런 데서 죽었나 싶었는데, 몸을 일으키려고 손을 짚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손이 낯설었다. 손을 들어보니 그 손이 내 손이 아니었다. 손톱 모양도 다르고, 손등에 난 흉터 위치도 다르고, 무엇보다 손이 너무 젊었다. 마르고 길쭉한, 스물몇쯤의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 아래로 배어 나온 핏자국을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남의 몸이었다. 당황할 새도 없이 머릿속으로 정보가 밀려들어왔다. 이름은 이도현. 나이 스물여섯. 서울던전탐사자협회 소속 E급 각성자. 등급 최하위권, 벌이도 최하위권. 부모는 강서윤이라는 여자와의 결혼을 이도현의 인생 최대 성과로 여기던 사람들이었고, 강서윤은 이도현에게 결혼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뒤로 이도현이 뭘 했는지도 딸려 왔다. 밤새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고, 문자를 지우고, 다시 걸고. 그리고 그날 밤 이도현은 손목을 그었다. 대충 그림이 맞춰졌다. 나는 죽었고, 이도현은 죽으려 했고, 어떤 우연인지 실수인지 두 영혼이 자리를 바꿔 앉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곧 취소해야 했다. 다행일 리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죽어 있었고, 이 몸의 원래 문제들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나한테 상속됐으니까. 빚도, 이별도, 손목의 상처도 전부. 일단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산 채로 던져진 세상이 어떤 규칙으로 굴러가는지 모르고서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협탁 위 스마트폰을 켜자 뉴스 앱이 자동으로 열렸다. 헤드라인이 죽 늘어서 있었다. 〈강남 게이트, D급 몬스터 3마리 소탕〉 〈던전탐사자협회, 헌터 등급 재심사 접수 마감 연장〉 〈이번 달 신규 게이트 발생 12건, 작년 동기 대비 15% 증가〉 〈각성자 없는 도시, 인류는 게이트를 감당할 수 있는가〉 이 세계엔 던전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서울 곳곳에 게이트라는 게 무작위로 열리고, 그 안에서 몬스터가 나오고, 그걸 처리하는 게 직업이 된 세상. 헌터, 각성자, 등급, 협회. 낯선 단어들이 이도현의 기억을 타고 줄줄이 이해가 됐다. 마치 몸에 저장된 데이터를 새 사용자가 그대로 넘겨받은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려던 걸 억지로 붙잡았다. 아득해할 여유가 없었다. 이 몸의 통장 잔액이 먼저 걱정됐다. 확인해보니 마이너스였다. 숫자를 두 번 다시 봤다. 세 번째로 봐도 마이너스였다. 각성자라는 게 몬스터 잡아서 돈 버는 직업이라며, 왜 통장은 이 지경인가 싶었는데, 이도현의 기억을 뒤져보니 이유가 금방 나왔다. E급 각성자는 벌이가 형편없었다. 던전 입장료, 장비 대여비, 협회 회비를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등급. 게다가 강서윤과 사귀는 동안 데이트 비용이며 선물이며 죄다 이도현 몫이었다. 인생 참 알차게 망가뜨려놓고 갔구나, 이도현. 그런 생각을 하는데 머릿속에서 대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소름이 쫙 돋았다. 목소리는 내 것도 아니고 상상도 아니었다. 마치 옆방에서 벽을 두드리며 말을 거는 것처럼, 분명한 실체를 가진 채로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몸 주인인데. 근데 방금 그쪽이 내 안방을 차지하고 앉은 것 같은데, 이거 좀 억울하지 않아요?' 죽은 줄 알았던 이도현의 잔재가 아직 이 안에 남아 있었다. 완전히 나간 게 아니라 어딘가에 웅크린 채로, 지금 내 상황을 재밌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놀랄 거 없어요. 나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구경만 하려고. 어차피 이 몸 나갈 생각도 없었으니까, 누가 들어와서 대신 좀 살아주면 나야 편하고.' '그게 무슨 논리예요. 여기 당신 몸이잖아요.' '그러니까요. 지긋지긋해서 그런 거지. 계속 살아봐야 별로 좋을 것도 없더라고요.' 말투가 능글맞았다. 억울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쪽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몸 안에 세입자가 있는 셋집이라는 뜻이었고, 세입자가 언제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계약서도 없고, 보증금도 없고, 쫓아낼 방법도 모르는 셋집. 최악의 부동산 거래였다. '설명 좀 해줄래요? 여긴 어디고, 나는 뭐고, 당신은 뭐예요? 이 몸에 계속 이렇게 붙어 있을 거예요?' 반문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 목소리가 킥킥 웃었다. '질문이 많아지네. 근데 그거 대답해줄 시간이 있나 모르겠는데.' '왜요.' '저기, 문 두드리는 소리 안 들려요?'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급하게 올라오는 소리, 그리고 곧이어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노크라기보다는 두들겨 부수려는 것 같았다. 쿵쿵쿵, 문짝이 흔들릴 만큼 세게. "도현아! 도현아, 문 열어!" 여자 목소리였다. 나이 든 사람의 목소리, 다급함과 짜증이 반쪽씩 섞인. 이도현의 기억 속에서 곧바로 이름이 떠올랐다. 어머니였다. 문을 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방에 들어올 열쇠를 갖고 있다는 것도 나름 의미심장했다. 스물여섯 먹은 아들 방을 자기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새도 없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여자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화장도 제대로 못 한 얼굴, 슬리퍼 한쪽이 뒤집힌 채로 신겨진 발. "너 정말 죽으려고 그랬어? 병원에서 전화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서윤이가 이 얘기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니!" 걱정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이름이 있었다. 강서윤. 아들이 죽다 살아났는데 첫마디가 그 여자의 시선이라는 게, 이 집안의 우선순위를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보다, 남 보기에 어떨지가 먼저였다.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그냥 붕대 감긴 손목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몸은 낯설었지만, 반응은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감추고, 숨기고, 우선 버텨보는. 머릿속에서 이도현의 잔재가 낮게 웃었다. '거봐요. 재밌을 거라고 했잖아.' '이게 재밌어요? 지금?' '나한텐 이십육 년째 재밌던데.'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방문 앞에 서서 뭐라 뭐라 쏟아내고 있었고, 그 말들 속엔 걱정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건 원망과 체면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 몸에 들어온 게 축복인지 재앙인지 진지하게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계산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답은 이미 마이너스로 찍혀 있는 통장 잔액과, 머릿속에 들어앉아 킥킥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눈앞에서 걱정보다 원망을 먼저 쏟아내는 어머니의 얼굴에 이미 다 적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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