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림받은 몸인데 헌터라니

4화

한상철이 뒷걸음질 치다 뭔가에 걸려 벌러덩 넘어졌다. 등에 진 배낭이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짓눌렸다. 창을 다시 주우려는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저건 뭐예요, 정확히." 내 목소리도 그리 안정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한상철보다는 조금 나았다. "몰라요! 저도 그냥 여기 뭐가 새로 들어왔단 소문만 듣고···." "소문만 듣고 여기까지 들어왔다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아니 그게, 확인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이렇게 클 줄은···." "근데 왜 여기까지 들어왔냐고요. 소문 하나 듣고 몸소 던전 최심부까지 걸어들어오는 헌터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한상철의 눈동자가 좌우로 굴렀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지금 그걸 캐물을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서윤 씨가, 확인 좀 해달라고···."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한상철은 뒤돌아 통로를 뛰어 나갔다. 등에 진 배낭이 요란하게 흔들리며 벽에 쿵쿵 부딪혔다. 파티고 뭐고, 자기 목숨부터 챙기는 게 정답이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잠깐이었다. 뒤이어 든 생각은 좀 덜 훈훈했다. '저 인간, 나 여기 두고 그냥 도망갔네.' 혼자 남았다. '저 인간 진짜 도망갔네. 그럴 줄 알았다.' 잔재가 킥킥거렸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는 정신 구조가 궁금했다. 웃을 상황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줘야 알아들을지 궁금했다. 애초에 알아들을 생각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왜요, 웃긴데. 저 사람도 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웃기냐고요.' '남 죽는 거 보고 도망치는 사람 뒷모습이 제일 웃겨요. 원래.' 취향이 고약하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을 정리했다. 강서윤이 이 던전에 사람을 심어놨다는 건, 단순히 옛 연인의 안부가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확인이라는 말이 걸렸다. 정확히 뭘 확인하려던 걸까. 이도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니면 이도현의 몸에 뭔가 이상이 생겼는지.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던전 입구에서부터 유독 나한테만 붙는 시선들, 파티 배정이 묘하게 어긋나던 순서, 그리고 한상철이 굳이 이 통로까지 따라붙었던 이유.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별일 아닌 것들이었는데, 모아놓고 보니 그림이 하나로 맞춰졌다.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기 위한 그림.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상황이 우연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를, 아니 이도현을 이 통로 끝까지 밀어넣은 것이다. 밀어넣고 뭘 보려던 걸까. 죽는 걸 보려던 건 아니었을 텐데. 아니, 어쩌면 죽는 것도 계산에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 법이니까. '이럴 때 옛 연인 원망하는 것도 사치예요. 지금은 발밑부터 걸러야죠.' 잔재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감정을 셈할 때가 아니었다. 진동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훨씬 가까웠다. 통로 벽에 새겨진 흔적을 따라 뭔가 거대한 형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벽을 긁는 소리인지, 뭔가 끌리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됐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손끝이 시렸다. 이도현의 몸이 반응하는 방식이었다. 회사원 시절엔 이런 신체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온몸이 알아서 위험을 계산하고 있었다. 손끝부터 시작해서 팔뚝, 어깨, 목덜미까지 서서히 식어가는 감각이 소름처럼 번졌다. '도망쳐야죠. 저 인간처럼.' 잔재의 목소리에 이번엔 조롱이 섞여 있지 않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평소엔 능글맞게 놀려대던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지면, 상황이 진짜 나쁘다는 뜻이었다. '근데 통로가 하나뿐이라···.' 그 말대로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그 길목에 이미 그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옆으로 새는 갈림길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협회 지도상에 이 구역은 그냥 일자 통로로 표시돼 있었다. 직선. 최악의 지형. 숨을 낮게 쉬며 통로 벽에 몸을 붙였다. 손전등을 끄고 어둠 속에서 눈만 굴렸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는 동안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런 순간에 판단력이 흐려지면 죽는다는 걸, 회사원 시절에도 수없이 배웠다. 상사 앞에서 판단력을 잃으면 보너스가 날아갔고, 지금은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다른 종류의 죽음이었지만, 원리는 비슷했다. 침착해야 산다. 벽에 등을 붙인 채로 숨을 셌다. 하나, 둘, 셋. 넷을 세기 전에 진동이 다시 울렸다. 형체가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크기가 사람 키 두 배였고, 몸 표면은 슬라임처럼 반투명했지만 그 안에 뼈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겹겹이 박혀 있었다. 뼈라고 부르기엔 형태가 너무 규칙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배열해놓은 것처럼. 슬라임의 상위 변이체였다. 협회 자료에 등록조차 안 된, 아마 이 던전에 새로 생겨난 개체. 새로 생겨난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될 종류의 것이라는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것이 멈춰 섰다. 마치 뭔가를 찾는 것처럼 통로 안을 두리번거렸다. 눈도 없는 몸통이 어떻게 두리번거리는 동작을 취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그런 인상을 받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코끝에서 뜨거운 게 흘러 콧등을 타고 내려왔다. 코피였다. 손등으로 급하게 훔쳤지만 계속 흘렀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거 봐요, 나도 좀 불편해요.' 잔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흐릿하게 갈라졌다. 마치 이도현의 잔재도 이 존재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 갈라진 목소리 틈에서 뭔가가 뭉개져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저건··· 저건 그냥 상위종이··· 아니에요···.' 말이 뭉개졌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능글맞던 목소리가 파편처럼 끊기는 걸 보니, 이건 단순한 상위 몬스터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 잔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시답잖은 농담을 던질 여유는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없었다. '뭔데요, 알면 말을 해요.' '그게··· 예전에··· 딱 한 번만 들었는데···.' '듣긴 들었으면서 말을 못 해요?' '말이 안··· 나와요. 이건···.' 말이 아예 끊겼다.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하다는 표현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 감각으로 다가왔다. 잔재조차 입을 다물게 만드는 존재라니. 이건 지금까지 마주친 그 어떤 것과도 급이 달랐다. 그 순간 슬라임 변이체가 고개를, 정확히는 몸통 상단부를 이쪽으로 완전히 돌렸다. 눈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는데, 분명히 나를 향해 시선을 맞춘 느낌이 들었다. 몸 안쪽에 박힌 뼈처럼 보이는 구조물들이 그 순간 일제히 미세하게 진동한 것 같기도 했다. 숨소리마저 죽였는데도 소용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어둠도, 낮춘 숨도, 벽에 붙인 몸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낮고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의 발성 구조로는 낼 수 없는 소리였다. 성대가 아니라 몸통 전체가 울려서 만들어내는 소리 같았다. [찾았느니라.] 숨이 멎었다. 도망칠 틈도 계산할 시간도 없었다. 그 육중한 형체가 통로를 부수며 이쪽으로 짓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벽이 갈라지는 소리, 바닥이 뒤흔들리는 진동,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몰려왔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잔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이 시끄러운 목소리가 이렇게 완전히 침묵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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