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제 그만 싸우기로 했다

4화

5년이 지났다. 마왕 토벌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도현과 서지우, 강민준과 박지훈, 한소연과 윤서아는 같은 마을에 정착했다. 작은 목조 주택들이 늘어선 거리였다. 지붕은 이끼가 덮여 있었고, 담장은 낮았다. 아침이면 우물가에서 물 긷는 소리가 들렸고, 저녁이면 시장에서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녔고, 노인들은 볕이 좋은 자리에 앉아 나른하게 졸았다. 이곳은 더 이상 낯선 세계가 아니었다. 5년 전만 해도 이들에게 이 세계는 죽음과 균열, 괴물의 울음소리로만 가득한 곳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람의 냄새가 배는 법이었다. 빵 굽는 냄새, 젖은 흙냄새, 말린 약초 냄새. 그 냄새들 속에서 다섯 사람은 각자의 자리를 찾았다. 이도현은 마을 어귀에 작은 연금술 공방을 열었다. 포션과 강화석을 만들어 팔았다. 초기에는 실패가 많았다. 포션이 폭발한 적도 있었고, 강화석이 오히려 무기를 부식시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손끝은 정교해졌다. 재료를 만지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공방을 "고블린 손"이라고 불렀다. 손이 빠르고 정확하다는 뜻이었다. 그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이도현은 웃었다. 그리고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아침 해가 창을 넘어 들어왔다. 빛은 먼지 낀 유리를 통과하며 부드럽게 흩어졌다. 이도현은 작업대 앞에서 눈을 떴다. 목이 뻐근했다. 어제도 작업대에 엎드려 잠든 모양이었다. 간밤에 만들다 만 강화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표면에 옅은 푸른빛이 감돌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규칙적인 세 번의 노크였다. 이도현은 그 리듬만으로 누구인지 알았다. "들어와." 서지우였다. 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가벼운 가죽 갑옷 위로 아침 빛이 얕게 미끄러졌다. 5년 전보다 어깨가 조금 더 단단해 보였다. 표정에는 예전보다 더 짙은 침착함이 배어 있었다. "일찍 왔네." 이도현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늦게 잤나 보네." 서지우가 작업대 위 강화석을 흘겨보며 답했다. "밤새 만들었어." "그러다 몸 상한다." "이게 다 팔려야 우리 마을 대장간이 돌아가." 서지우는 픽 웃었다. 그 웃음에는 익숙함이 있었다. 5년 동안 반복된 아침의 온도였다. "오늘 토벌대 소집이 있어." 그녀가 말했다. "또?" "마왕성 근처 균열이 넓어지고 있대." 이도현은 강화석을 내려놓았다. 손끝에 남은 마력의 잔여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위험한 거야?" "모르지. 가봐야 알아."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5년 동안 반복된 아침이었다. 하지만 매번 조금씩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오늘은 그 무게가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 이도현은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서지우의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자신에게 머물렀다는 것만 느꼈다. "균열이 넓어진다는 건, 안쪽에서 뭔가 밀고 나온다는 뜻 아니야?" 이도현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세계가 낡아가는 것일 수도 있고." "낡아간다니." "5년이나 지났잖아. 세계도 사람처럼 늙는 거 아닐까." 이도현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서지우는 종종 이런 식으로 말했다. 가볍게 던진 문장 속에 무거운 진심을 숨겨두는 버릇이었다. "조심해." 이도현이 말했다. "당연하지." 서지우가 답했다. 그녀가 문을 나서기 전, 이도현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입 안에서 몇 번이나 굴렸던 말이었다. 5년 동안 수백 번은 굴렸을 말이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하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다녀올게." 서지우가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혔다. 이도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작업대 위 강화석을 다시 집어 들었다. 푸른빛이 손바닥 위에서 은은하게 맥박처럼 뛰었다. 이 감각은 익숙했다. 반면 방금 문을 나선 사람에 대한 감각은, 5년이 지나도 여전히 낯설었다. 이도현은 문득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던 날을 떠올렸다. 비명과 불길, 낯선 언어로 울부짖는 괴물들. 그 혼란 속에서 서지우가 검을 들고 그의 앞을 막아섰던 순간. 그 순간의 온도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같은 시간, 마을 외곽 훈련장에서는 강민준과 박지훈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훈련장은 흙바닥이었다. 군데군데 짚단으로 만든 표적이 세워져 있었고, 나무 방패와 목검이 벽에 걸려 있었다. 아침 공기는 서늘했고, 두 사람의 숨결이 하얗게 번졌다. "도현이 아직도 말 못 했지." 박지훈이 물었다.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며 시위에 걸었다. "5년째야." 강민준이 답했다. 방패를 앞으로 밀며 자세를 낮췄다. "저러다 서지우가 먼저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아냐." "그건 좀..." 박지훈이 웃었다. "내가 보기엔 서지우도 눈치는 채고 있는 것 같은데." "눈치채고 있으면 왜 가만히 있어?" "기다리는 거지." 강민준은 훈련용 방패를 들며 자세를 잡았다. 목검이 방패에 부딪혀 둔한 소리를 냈다. "기다리다가 둘 다 죽으면 어떡해." 박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가 놓았다. 화살이 표적 정중앙에 꽂혔다. "저 위에서 다 지켜보고 있잖아." 박지훈이 하늘을 가리켰다. "신이 저 둘 마음까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강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는 좀 소름 끼치는데." 그는 목검을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근데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잖아." "우리가 뭐." "우리도 5년 동안 뭐 하나 진전 있었어? 여전히 같이 훈련만 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정찰 나가고." "우리는 친구잖아." 박지훈이 눙치듯 대답했다. 강민준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박지훈은 화살을 하나 더 꺼내며 대답을 피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표적에 화살이 다시 꽂혔다. 이번에는 정중앙에서 살짝 빗나갔다. "오늘은 좀 흔들리네." 강민준이 놀리듯 말했다. "닥쳐."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훈련장 저편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집을 알리는 종이었다. "가자." 강민준이 방패를 내려놓았다. "또 균열이야?" "그런가 봐." 두 사람은 무기를 챙기며 훈련장을 나섰다. 5년 전이었다면 이 종소리에 심장이 요동쳤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익숙한 일상의 리듬이었다. 하지만 익숙함이 곧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 토벌대 소집 장소에는 한소연과 윤서아도 있었다. 넓은 광장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기도 했고, 토벌대가 모이는 집결지이기도 했다. 오늘은 좌판이 몇 개 걷혀 있었다. 소집이 있는 날에는 늘 그랬다. 두 사람은 벽에 나란히 기대어 있었다. 윤서아가 물통을 건넸고, 한소연이 받아 마셨다. 작은 몸짓이었지만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저 커플, 아직도 진전이 없어?" 한소연이 물었다. "누구, 이도현이랑 서지우?" 윤서아가 답했다. "응." "5년이나 같은 동네 살면서 저러는 거 보면, 웬만한 벽이 있나 봐." 한소연이 웃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야?" "우리랑 걔들은 다르지." 윤서아가 한소연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한소연은 그 손을 잡고 살짝 웃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얽혔다. 5년 동안 쌓인 습관이었다. "우리는 이미 시작한 사이잖아." 윤서아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저 둘은 아직 첫 발도 못 뗐고." "그건 그렇지." 한소연은 윤서아의 손을 잠시 더 쥐고 있다가 놓았다. "근데 가끔 보면 안타까워. 도현이 눈빛 보면 다 티가 나는데." "지우도 마찬가지야. 어제 훈련 끝나고 도현이 얘기하는 표정 봤어? 자기도 모르게 웃더라." "그러니까 답답한 거지." 그때 서지우가 다가왔다. 검집이 걸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둘이 뭐 재밌는 얘기 해?" "아니, 별거 아니야." 한소연이 답했다.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서지우는 그 눈치를 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서지우는 짐짓 모르는 척 웃으며 대형에 합류했다. 토벌대 대표가 앞으로 나섰다. 갑옷 위로 오래된 상처들이 흉터로 남아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손을 들어 대열을 조용히 시켰다. "균열 근처에서 이상 반응이 감지됐다. 모든 조는 대기하고, 정찰조만 먼저 이동한다." 광장에 낮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5년 동안 이런 소집은 수십 번 있었다. 하지만 "이상 반응"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는 늘 분위기가 달라졌다. 서지우가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한소연과 윤서아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험하다는데 왜 나서." 한소연이 낮게 물었다. "누군가는 가야 하니까." 윤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서지우의 어깨를 툭 쳤다. "살아 돌아와." 서지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찰조와 함께 떠났다. 정찰조는 다섯 명이었다. 그들의 발소리가 광장 바닥을 두드리며 멀어졌다. 한소연은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저러다 진짜 도현이한테 말도 못 하고 뭔 일 생기면 어쩌나."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윤서아가 한소연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그냥 걱정돼서 그래." "나도 걱정돼."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햇빛이 광장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 속에 다섯 명의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정찰조가 떠난 뒤, 광장에 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좌판이 다시 펼쳐졌고, 흥정 소리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도현도 그 소식을 들었다. 공방 문을 열고 나온 그는 광장 쪽을 바라보았다. 서지우가 정찰조로 나갔다는 이야기를 강민준에게서 전해 들었다. "위험한 거야?" "몰라. 근데 지우 표정이 좀 심각했어."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든 강화석을 꽉 쥐었다. 푸른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날 오후, 이도현은 평소보다 더 많은 포션을 만들었다. 손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만약을 위한 대비였다. 만약이라는 단어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 그날 밤, 균열 근처에서 이상한 진동이 감지되었다는 보고가 마을 전체에 퍼졌다. 웅— 땅이 아니라 공기가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창문을 닫고, 아이들은 부모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도현은 공방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작업대 위 강화석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가 만든 것 중 가장 예민한 물건이었다. 그것이 반응한다는 건, 진동이 마력의 파형을 담고 있다는 뜻이었다. 강민준과 박지훈은 훈련장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무기를 집어 들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한소연과 윤서아는 광장 근처 집 창가에 서 있었다. 서로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그 손끝에도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그 진동은 5년 전 김태호가 신에게 저항을 선언했던 날의 진동과 똑같은 파형이었다. 이도현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소리, 그날의 냄새. 잊고 싶었지만 몸이 먼저 기억해버린 감각이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지우가 떠난 방향이었다. 어둠 속 저 멀리, 균열이 있던 자리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웅— 다시 한 번, 같은 파형이 울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가까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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