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제 그만 싸우기로 했다

3화

상급 개체는 그날 밤 물러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핏자국이 남은 자리에서 냄새가 났다. 비린 쇠 냄새. 불에 탄 나무 냄새. 그리고 그 밑에, 뭔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냄새였다. 어쩌면 사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른일곱 명 중 몇은 이미 자기 손으로 다치지 않고서는 못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눈은 이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초점이 없었고, 손끝은 떨렸고,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한 달이 지났다. 생존자는 서른두 명이 되었다. 다섯 명이 사라진 이유는 각자 달랐다. 누구는 몬스터에게, 누구는 스스로에게. 아무도 그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마을이라 부를 만한 곳에 겨우 정착했다. 낡은 목조 건물 몇 채가 늘어선, 이름 없는 정착지였다. 지붕에는 이끼가 앉아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못 자국이 줄줄이 박혀 있었다. 누군가 살다가 떠난 흔적이었다. 주민들은 이방인을 경계했지만 내치지는 않았다. 그들도 어디선가 왔을 것이었다. 어디서 왔는지는 묻지 않는 것이 이곳의 예의였다. 이도현과 강민준, 박지훈은 한 조가 되었다. 서지우와 한소연, 윤서아는 다른 조가 되었다. 누가 정해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는 동안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게 된 무리였다. 각자의 힘을 시험하는 것이 그들의 첫 임무였다. 연금술사가 된 이도현은 흙과 풀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는 법을 익혔다. 손끝에 닿는 재료들의 성질이 눈앞의 창에 자동으로 표시되었다. [하급 약초: 회복 효과 미약.] [철광석 부스러기: 강화 재료로 사용 가능.] [젖은 나무껍질: 사용 불가.] 처음에는 창에 뜨는 글자들이 낯설었다. 손가락으로 잎사귀를 뜯을 때마다 세상이 그를 채점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었다. 강민준은 방패를 쥐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방패의 무게에 팔이 떨렸다. 열흘쯤 지나자 팔이 아니라 어깨로 무게를 받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건 그냥 막는 도구가 아니야." 훈련을 도와주던 정착지 주민이 말했다. "버티는 도구지." 강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매일 밤 방패를 어루만졌다. 박지훈은 활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시위를 놓을 때마다 손끝이 갈라졌다. 피가 나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은 백 번을 쏘고 겨우 열 번을 맞혔다. 다음 날은 서른 번을 맞혔다. 그는 그 숫자들을 손등에 손톱으로 새겨 넣듯 기억했다. 세 사람의 조합은 나쁘지 않았다. 이도현이 상황을 읽고, 강민준이 앞을 막고, 박지훈이 뒤에서 정리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서가 생겼다. 서지우의 검은 매일 조금씩 더 매끄러워졌다.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달라졌다. 처음엔 둔탁한 파공음이었다. 지금은 얇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녀는 검을 쥔 손을 볼 때마다 낯선 감정을 느꼈다. 자신의 손이 아닌 것 같았다. 한소연은 마법사로 각성해 불꽃을 다루었다. 손바닥 위에 처음 불씨가 피어올랐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봐, 이거 봐!" 윤서아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불씨는 곧 사그라들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 남았다. 윤서아는 전사로, 근접전에서 흔들림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녀는 말이 적었다. 대신 누구보다 먼저 전열 앞으로 나서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마물의 공격이 눈앞까지 다가와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훈련이 거듭될수록 동료들의 움직임에 맞춰 전열의 빈틈을 메우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법을 익혀 갔다. 그러나 시스템은 자비롭지 않았다. 매 순간 그들의 선택을 시험했다. 쉬는 시간에도, 밥을 먹는 시간에도, 창은 조용히 그들을 따라다녔다. 어느 날, 마을 외곽에서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다. 이도현의 조가 먼저 발견했다. 숲의 경계에서 흙이 들썩였다.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땅을 타고 올라왔다. 발밑의 잔돌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마리야?" 강민준이 물었다. "셀 수 없어." 이도현이 답했다. 숫자를 세기도 전에 나무들 사이로 회색 형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 셋으로는 못 막아." 박지훈이 말했다. "지원 요청해야 해." 강민준이 답했다. 이도현은 눈앞에 뜬 창을 바라보았다. [퀘스트 발생: 정착지를 방어하라.] [실패 시 : 정착지 소멸.] 글자들이 붉게 번쩍였다. 경고음처럼 눈앞에서 깜빡거렸다. "이거 안 하면 마을 전체가 사라진다는 거야?" 이도현이 물었다.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세 사람은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를 알렸다. 종을 쳤다. 누군가 소리쳤다. "몬스터다! 전부 대피해!" 문이 닫히는 소리, 아이 울음소리, 발소리가 뒤섞였다. 그리고 그 소음이 잦아들었을 때, 세 사람은 무리와 맞섰다. 전투는 길었다. 이도현은 급조한 폭발 물질을 던졌다. 손끝에서 만들어낸 것이 눈앞에서 불꽃과 함께 터졌다. [제조 성공: 하급 폭발석.] 이라는 글자가 시야 한 켠에서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강민준이 몸으로 앞을 막았다. 방패에 부딪히는 충격이 어깨를 타고 척추까지 울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뒤는 걱정 마!" 박지훈의 화살이 정확히 몬스터의 눈을 꿰뚫었다. 한 발, 두 발, 세 발. 화살통이 비어갈수록 그의 손은 더 정확해졌다. 무리는 물러갔다. 마을은 지켜졌다. 세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그날 밤, 이도현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전투 도중,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시선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는, 관찰당하는 감각이었다. 목덜미가 아니라 가슴 안쪽이 서늘해지는 느낌. 그는 밤늦게 숙소 밖으로 나갔다. 공기는 차가웠다. 별은 낯선 위치에 떠 있었다. 이곳의 하늘은 원래 그가 알던 하늘과 달랐다. 그는 눈앞에 창을 다시 띄웠다. [관찰자: 신] [모든 선택은 기록됩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는 곧바로 창을 닫았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숙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서지우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그를 찾아왔다. 그녀의 발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무언가를 깨우지 않으려는 것처럼. "너도 봤어?" 그녀가 물었다. "뭘." "관찰자 표시." 이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표정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만이 유일한 단서였다. "우리가 뭘 하든 지켜본다는 거잖아." "응."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이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 그 사이를 채웠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죽어도, 신은 그냥 보고만 있는 거네." 서지우가 말했다. "그렇겠지." 이도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낯선 별자리들이 무심하게 떠 있었다. 저 별들 중 어딘가에 정말 신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그는 그 생각을 오래 붙잡고 있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근데 이상하지 않아?" 서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기록한다면서, 왜 아무 반응이 없을까." "…" "우리가 잘해도, 못해도,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거." 이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순간, 마을 광장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들이 몰려가는 소리.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김태호 선생님이 뭘 하려는 거야!" 이도현은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서지우와 눈을 마주치고 곧바로 광장 쪽으로 달렸다. 발밑의 흙이 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광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착지 대표들, 다른 반 아이들, 처음 보는 주민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해 있었다. 담임이었던 김태호가 정착지 대표들 앞에서 무언가 선언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다독이던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 그 얼굴에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나는 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주변이 얼어붙었다.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그 말에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이도현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가 물었다. 김태호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정착지 대표들을 향해 있었다. "이도현, 넌 몰라도 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이건 내가 결정한 일이다." 하늘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웅— 발밑의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의 발끝에서 흙먼지가 살짝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그 진동은 경고였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이도현은 김태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서 그는 낯선 것을 보았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포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확히는, 어떤 종류의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 결심이 무엇을 부를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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