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제 그만 싸우기로 했다

1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갈 시간이었다. 형광등 불빛이 창문에 하얗게 번졌다. 운동장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매미 울음만 길게,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도현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연습장 위에 낙서가 가득했다. 동그라미. 세모. 의미 없는 글자들. 펜을 쥔 손이 반쯤 풀려 있었다. 서지우는 두 자리 건너에서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딱딱, 볼펜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 규칙적인 박자였다. 그 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이도현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만 좀 해."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서지우가 볼펜을 멈췄다. "공부하는 척이라도 해." "하고 있었어." "엎드려서?" 이도현은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서지우는 픽 웃고는 다시 볼펜을 돌렸다. 딱딱, 딱딱. 같은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교실 뒤쪽에서는 강민준이 휴대폰을 몰래 만지고 있었다. 박지훈은 창가에 붙어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한소연과 윤서아는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 평범한 밤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그날이 마지막 밤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형광등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뭐야, 정전이야?" 누군가 중얼거렸다. 형광등이 완전히 꺼졌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책상 사이를 비췄다.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정전이야?" 대답은 없었다. 박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불 좀 켜볼까—"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성별도 나이도 가늠할 수 없는, 머릿속에서 곧바로 울리는 소리였다. 고막을 거치지 않고 뇌 안쪽에서 곧장 터지는 것 같았다. [듣거라.] 교실 전체가 숨을 멈췄다. 펜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누군가의 의자가 삐걱, 소리를 냈다. 강민준이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액정 불빛이 바닥에서 위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이 그의 얼굴을 아래에서 흐릿하게 밝혔다. [너희는 선택되었다. 마왕을 토벌하라.] 이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옆자리 서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도 같은 당혹이 담겨 있었다. 평소라면 뭐라도 한마디 쏘아붙였을 그녀였다. 지금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교실 어딘가에서 한소연이 작게 신음했다. 윤서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거역은 곧 소멸이다.] 목소리가 그렇게 말한 순간, 바닥이 빛으로 물들었다. 하얀 빛이 발밑에서부터 솟구쳤다. 바닥 타일 틈새마다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 "뭐야, 이거!" "선생님! 선생님 어디 있어요!" 담임은 이미 교무실로 내려간 지 오래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였다. 이도현은 손을 뻗었다. 무언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서지우의 손목이었다. "뭐 하는—" 서지우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말을 끝맺지 못했다. 빛이 눈을 삼켰다. --- 눈을 떴을 때, 형광등은 없었다. 하늘이 있었다. 두 개의 달이 걸려 있는 하늘이었다. 하나는 크고 붉었고, 하나는 작고 푸르렀다. 색이 다른 두 달빛이 서로 섞이며 이상한 빛깔로 대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도현은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땅을 짚은 손바닥에 젖은 흙이 묻어났다. 풀냄새. 흙냄새. 그리고 낯선 냄새. 비릿하고 무거운, 짐승의 냄새였다. 학교에서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은 반 아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는 아직 정신을 잃은 채였고, 누군가는 막 눈을 뜨고 신음하고 있었다. 서지우는 아직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도현은 그제야 자신도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야." 서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몰라." 이도현이 답했다. "학교가 아닌 건 확실해." 서지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달과 푸른 달이 나란히 떠 있었다. "두 개야. 달이 두 개야." "그러네." "그러네, 라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제인데." "…모르겠어."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변에서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강민준이 비틀거리며 이도현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야, 이도현. 이거 몰카 아니지? 몰카 아니지?" 이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박지훈은 아직 바닥에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싼 채, 흙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었다. 한소연과 윤서아는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한소연이 울음을 참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윤서아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낮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도현은 주위를 다시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마흔한 명. 같은 반 학생들 전부였다.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교실째로 옮겨진 것 같았다. "전부 다야." 서지우가 중얼거렸다. "우리 반, 전부." 그때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았다. 소리가 대지를 타고 퍼지는 느낌이었다. [여기는 이차원의 대지, 아르텐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낮은 소음이 일었다. 누군가는 욕설을 뱉었고,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희에게는 각자의 힘이 주어졌다.] [마왕을 처단하기 전까지, 돌아갈 방법은 없다.] 누군가 소리쳤다. "장난치는 거지? 이거 몰카지?" 그 목소리는 강민준이었다. 그는 여전히 휴대폰을 찾는 듯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액정이 완전히 꺼진 휴대폰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대답은 없었다. 목소리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우리 지금 죽는 거야? 죽었어?" "조용히 좀 해봐, 무슨 소리 안 들려?" 대신 저 멀리 능선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검은 형체였다. 형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족히 스무 개는 되어 보였다. 능선을 따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멈췄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소리였다. 땅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은, 낮고 무거운 진동이었다. 이도현은 서지우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손끝이 하얗게 되어가는 걸 느끼면서도, 누구도 먼저 놓지 않았다. "저게 뭐야." 서지우가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몰라." 이도현이 다시 답했다. "근데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검은 형체들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걸음마다 땅이 울렸다. 발소리 하나에도 대지가 진동을 삼키는 느낌이었다. 박지훈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저거… 사람 아니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민준이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가야 돼. 도망가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이 미끄러졌다. 젖은 풀 위로 그가 넘어졌다. 웅— 귓속에서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다. 소리라기보다는 감각이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파장 같았다. 동시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글자들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똑같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짧은 놀람의 소리가 터졌다. [상태 창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이도현은 그 글자를 읽을 틈이 없었다. 검은 형체 중 하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속도가 상상보다 빨랐다. 사람이 달리는 속도가 아니었다. "피해!" 누군가 소리쳤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없었다. 서지우가 이도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도현은 몸을 돌리며 그녀를 자신의 뒤로 밀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검은 형체가 가까워질수록, 그 형체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났다. 사람보다 크고, 사람보다 낮은 자세로.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두 점의 불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사람은 믿는 만큼만 본다. 하지만 지금 이도현의 눈앞에 있는 것은, 믿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실체였다. 그 실체가, 이제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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