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956년, 아들이 되었다

4화

박준서가 자전거에서 내렸다. 바퀴가 자갈 위에서 미끄러지며 멈추는 소리가 났다. 나를 발견한 그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 "누구요."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사람과 말을 섞지 않은 목소리의 결이었다. 말끝이 갈라지듯 거칠었다. "어르신 댁에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준서의 시선이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값을 매기듯 천천히. 그 눈빛에 경멸이 섞여 있었다. "당신도 우리 부모님한테 빌붙는 사람이오." "빌붙는다는 표현은 좀 심하지 않나요." "어차피 다 그런 거잖소."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 다." 준서가 자전거를 세우며 자루 안에서 책 몇 권을 꺼냈다. 낡은 소설책들이었다. 표지가 다 해져 있었고, 귀퉁이가 접힌 페이지가 여러 장이었다. 한때는 누군가 정성껏 읽었던 책이라는 게 느껴졌다. "산 아래 서 씨네서 빌려온 책이오." "매일 이렇게 다니십니까." "그럴 시간은 있으니까." 자조가 담긴 말이었다. 나는 그 말투에서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시간이 있다는 말은, 보통 자랑이 아니라 체념일 때가 많았다. 그는 나를 지나쳐 별채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자전거를 끄는 손목에 힘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았다. "준서 씨."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철컥, 하고 걸쇠가 걸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 뒤로는 다시 정적이었다. 바람이 지붕 위 슬레이트를 긁는 소리만 남았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방금 본 것을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했다. 스물여덟, 어쩌면 스물아홉쯤 되어 보이는 남자. 말투는 냉소로 가득했지만, 눈빛은 그보다 더 지쳐 있었다. 경멸이 아니라 방어였다. 누가 자신을 건드리기 전에 먼저 밀어내는 방식. 익숙한 패턴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박철수에게 준서를 만났다고 말했다. 마당 평상에 앉아 있던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뭐라고 하던가." "빌붙는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박철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입가만 움직인 표정이었다. "그놈이 그런 말투로 밖에 말을 못 하오." "원래 저런 애가 아니었소." 김순자가 밥을 짓다가 손을 멈췄다. 부엌 문틈으로 그녀의 옆얼굴이 보였다. "학교 다닐 때는 착했는데." "동네 사람들한테 인사도 잘하고, 웃음도 많았는데." "직장 생활 반년 하고 저렇게 됐어." 박철수가 담배를 꺼내려다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서울서 회사 다녔소. 무슨 마케팅 회사라던가." "반년 만에 그만두고 내려왔소." "그 뒤로는 방에서 안 나오는 날이 더 많았지." "병원엔 가봤습니까." "몇 번 데려갔소." "약도 받아왔는데, 안 먹으려 해서." "먹으라고 하면 화만 내니까, 이제 말도 못 꺼내오." 김순자가 국자를 든 채로 우리 쪽을 돌아봤다. 그녀의 눈이 이미 붉어져 있었다.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요." "없어지면 편해질 거라고, 그런 소리를." 박철수가 그녀의 말을 자르듯 헛기침을 했다. 더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나는 준서의 눈빛을 다시 떠올렸다. 초점이 없던 눈, 경멸로 뒤덮인 말투.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조금씩 짐작이 갔다. 그날 밤, 헛간에 누워 낮에 들은 말들을 다시 곱씹었다. 반년. 방에서 안 나오는 날. 없어지면 편해질 거라는 말. 단어 하나하나가 무게를 가지고 가슴 어딘가에 내려앉았다. 다음 날, 나는 산길에서 준서를 기다렸다. 그가 내려오는 시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경. 숲길 초입, 커다란 소나무 아래 서서 시계를 확인했다. 9시 27분. 9시 29분. 자전거 바퀴 소리가 들렸다. 준서가 나타났다. 나를 보자 표정이 굳었다. "또 당신이오." "몇 마디만 하고 싶어서요." "할 말 없소." "저는 있습니다." 준서가 자전거를 세우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나는 옆으로 걸으며 말을 이었다. 자전거 속도에 맞춰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십니다." "당신이 뭘 아오." "2년째라고 들었습니다." 준서가 자전거를 멈췄다. 브레이크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거요." "내 인생이 어떤지 알기라도 하오." "모릅니다." "그러면 입 다물어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난 아무것도 아니오." "부모님한테 짐만 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오."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사람." 그 말을 뱉는 준서의 얼굴에 자조가 짙게 배어 있었다. 웃으면 안 될 상황인데,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가 있었다. 웃는 게 아니었다. 웃음의 형태를 빌린 절망이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건 왜 묻소." "그냥, 궁금해서요." "당신 같은 사람이 궁금해할 일이 아니오." 준서가 페달에 발을 올렸다. 나는 자전거 손잡이를 잡았다. 그가 나를 노려봤다. "놓으시오." "조금만 더요." "뭘 더 듣고 싶은 거요." 나는 그 순간 뭔가를 확실히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게으르거나 방황하는 청년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자기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어 하는 상태였다. "당신은 사라지고 싶은 겁니까." 준서가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 처음으로 균열이 보였다. 경멸 아래, 뭔가 무너지려는 게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오." 대답을 피하지 않은 것 자체가 대답이었다. 그가 손잡이를 뿌리치듯 빼내고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가 흙길을 달려 멀어졌다. 바퀴가 남긴 자국만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들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됐다. 없어지면 편해질 거라는 말.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사람이라는 말. 그 말들이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밤마다 헛간에 누워 생각했다. 처음 떠올렸던 가능성. 준서의 신원을 대신 얻어, 노부부의 아들로 이 세계에 정착하는 것. 그 생각을 다시 떠올렸지만, 이제는 무게가 완전히 달랐다. 처음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단순한 계산이었다. 빈자리, 신원, 정착. 투자자가 저평가된 종목을 찾아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버려진 자리, 아무도 채우지 않는 이름, 그걸 대신 차지하면 되는 문제라고.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이름 하나를 빌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는 일이었다. 그의 부모, 그의 삶, 그가 살아왔던 모든 흔적을 대신 차지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스스로 사라지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 모순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딪쳤다. 돕고 싶은 마음과, 그를 이용하려는 계산이 동시에 존재했다. 둘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만약 준서가 정말로 사라진다면. 그 자리를 내가 채운다면. 그건 우연히 얻은 기회일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결과일까. 그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두려웠다. 어느 순간, 내가 그의 절망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헛간 안 공기는 그대로였는데, 몸만 유독 서늘했다. 닷새 뒤, 이른 새벽이었다. 새벽 4시 무렵.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다. 김순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헛간까지 들려왔다. "철수 씨! 준서가!" 나는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맨발에 흙이 밟혔다. 차가운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박철수가 별채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별채 문이 부서져 있었다. 문틀 한쪽이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나무 파편이 마당에까지 튀어 있었다. 안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그 뒤로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 무언가를 벽에 던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김순자가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을 향해 소리쳤다. "준서야, 문 열어! 준서야!" 박철수가 부서진 문틈으로 손을 넣어 안쪽 걸쇠를 풀려 했다. 손이 떨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뒤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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