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956년, 아들이 되었다

2화

"누구냐고 물었잖소."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낫을 든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경계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을 펴 보였다. 무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길을 잃었습니다." 간신히 그 말을 뱉었다. 거짓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나는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였다. 다만 길을 잃었다는 표현이 이 상황을 설명하기엔 너무 얌전했다. 나는 시간을 잃었다. 공간을 잃었다. 어쩌면 나 자신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여자가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철수 씨, 저 사람 다친 것 같아." 그 말에 남자, 아니 박철수라 불린 그가 나를 다시 훑어보았다. 낫을 쥔 손에서 힘이 살짝 풀렸다. 내 팔뚝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 귀환문을 통과하며 생긴 것인지, 떨어지며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피가 조금 말라붙어 있었다. 상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경계보다 다른 감정이 스치는 게 보였다. "어디서 왔소." 박철수가 물었다. 나는 대답을 고르는 데 몇 초를 썼다. 그 몇 초가 영원 같았다.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문장을 만들었다가 지웠다. 마왕성에서 왔습니다, 는 안 될 말이었다. 귀환문을 잘못 타서 여기 떨어졌습니다, 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에게 어떤 말도 진실로 들리지 않을 터였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반쯤은 진실이었다.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에서는 진실이었다. 어쩌면 완전한 거짓보다 반쯤의 진실이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박철수와 여자, 김순자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말없이 무언가를 주고받는 시선이었다. 오래 함께 산 부부의 대화법이었다. 나는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삶을 짐작했다. 서로에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시간을, 몇 년쯤 쌓아왔는지. "일단 들어와요." 김순자가 먼저 말했다. 박철수는 낫을 어깨에 걸치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 걸었다. 발밑에서 마른 풀이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마저 낯설었다. 그날 밤, 나는 초가집 마루에 앉아 있었다. 호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김순자가 죽을 내왔다. 좁쌀에 나물을 섞은 죽이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숟가락을 쥔 손이 떨렸다. 이유는 배고픔이 아니었다. "천천히 먹어." 김순자가 말했다. 그 말투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마음이 이상했다. 마왕과 싸우던 시절에는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동료들도 각자 살아남는 데 급급했다. 누군가 다치면 붙잡아주는 손이 있었지만, 밥을 먹으라 말해주는 입은 없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저 밥 먹으라는 말이었다. 죽을 삼켰다. 목이 메였다. 눈물이 나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숟가락질을 세 번, 네 번 반복했다. 좁쌀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뭔가가 함께 밀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게 슬픔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었다. 박철수는 마루 끝에 앉아 곰방대를 태웠다. 연기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다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물었다. "올해가 몇 년이오."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철수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단기 4289년, 서기로는 1956년 아니오." 1956년. 그 숫자를 듣는 순간, 뭔가가 명확해졌다. 내가 원래 살던 시대가 아니었다. 내가 목표한 좌표는 21세기였다. 그런데 문은 나를 반세기도 더 전의 과거로 던져 넣었다. 숫자를 다시 되짚었다. 2024년에서 1956년. 68년. 그 68년이라는 간극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생각했다. 마력의 결, 좌표 계산, 심장 마정석의 순도. 어느 하나가 틀렸던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시간이라는 축을 계산에 넣지 않은 내 실수였을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귀환문을 열 때 마지막으로 확인한 마력 수치가 떠올랐다. 92퍼센트.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돌아갈 방법이 있나요." 혼잣말처럼 뱉었다. 박철수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어디서 왔길래 그런 소릴 하오." 나는 답을 삼켰다. 곰방대 연기가 다시 한 번 흩어졌다. 김순자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녁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날부터 며칠, 나는 노부부의 집 헛간에 머물렀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였다. 집이 열 채도 되지 않았다. 전쟁을 겪은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무너진 담, 불에 탄 서까래, 아직 메워지지 않은 구덩이. "전쟁 통에 마을 절반이 죽었소." 박철수가 밭을 갈며 말했다. 담담한 말투였다. 너무 담담해서, 그 말 뒤에 있는 것들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가 쥔 쟁기의 손잡이가 오래 써서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그 닳은 자리에 몇 년의 시간이 배어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도와 밭일을 했다. 마력은 없었다. 순수한 육체노동이었다. 마왕과 싸울 때 쓴 근육이, 이런 데 쓰인다는 게 이상했다. 검을 쥐던 손으로 호미를 쥐었다. 불꽃을 다루던 손끝으로 흙을 골랐다. 어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색함이 나쁘지 않았다. 첫날은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둘째 날은 그 물집이 터졌다. 셋째 날은 굳은살이 잡히기 시작했다. 몸이 이 시대에 적응하는 속도가 마음보다 빨랐다. 밤에는 헛간에 누워 천장을 봤다. 서까래 틈으로 별빛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 했다. 마력을 회복시킬 방법도, 좌표를 다시 계산할 방법도 없었다. 마정석은 완전히 소진됐고, 이 시대에 그런 걸 재충전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계산을 다시 했다. 좌표, 시간 축, 마력 소모율. 숫자들을 이리저리 옮겨봤지만, 결론은 같았다. 방법이 없다. 그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말이 반복될수록 실감이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점점 더 멀게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다. 그 사실이 서서히 몸에 스며들었다. 느껴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도, 절망도, 아무것도. 그저 텅 빈 자리만 있었다. 마치 계좌에서 잔고가 0이 되었는데, 그 숫자를 보고도 아무 감흥이 없는 것과 비슷했다. 손실이 이미 확정된 후에는, 손실이라는 말조차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넷째 날 저녁, 나는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박철수와 마주쳤다. 그는 지게를 진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향이 어디요." 또 그 질문이었다. 나는 물동이를 고쳐 잡으며 웃었다. "먼 곳입니다." "먼 곳이 어디요." "아주, 아주 먼 곳입니다."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지게를 고쳐 메고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서, 더 묻지 않는 것도 배려라는 걸 배웠다. 닷새째 되는 날 저녁, 김순자가 밥상을 차리며 한숨을 쉬었다. 상 위에 놓인 반찬이 어제보다 하나 줄어 있었다. 쌀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나는 눈치로 알았다. "준서가 또 밥을 안 먹는다고 하네." 박철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숟가락을 든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숟가락을 든 채 물었다. "준서가 누굽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봤다. 그 눈빛에, 뭔가 무거운 것이 얹혀 있었다. 공기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호롱불 심지가 타는 소리만 들렸다. "우리 아들이오." 박철수가 짧게 답했다. "몇 살입니까." "스물다섯." "어디 있습니까." 박철수는 대답 대신 산 쪽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 산 너머, 골방에." "2년째, 방에서 안 나오오." 김순자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녀는 상 위의 밥그릇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온기가 남은 밥그릇이었다. 그 온기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한 채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 침묵의 무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죽은 이미 다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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