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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재료실 선반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말린 히아신스 다발과 유리병에 담긴 캡사이신 추출물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선반 위에는 그 외에도 온갖 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라벤더 오일, 로즈마리 정유, 정향 가루가 담긴 작은 항아리들. 먼지가 얇게 쌓인 걸 보니 최근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재료들인 모양이었다. 손끝으로 병목을 만지자, 오래전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유리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는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열두 살, 어머니의 서재. 나무 냄새와 마른 약초 냄새가 뒤섞인 그 방의 공기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최여옥은 그때 내게 낡은 약학서를 건네주며 말했다. "네가 궁정에 갈 필요는 없어. 네가 원하는 만큼만 배워도 돼." 그 말을 하던 어머니의 표정은 담담했다. 강요하지도, 부추기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서재에서 밤새는 걸 좋아했다. 촛불 아래에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약초의 성분을 분석하고, 조합법을 외우고, 실패한 배합을 기록하는 일. 실패한 배합조차도 나에게는 소중한 자료였다. 무엇이 왜 실패했는지를 알아내는 과정 자체가 흥미로웠으니까.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놀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 때, 나는 절구와 저울을 가지고 놀았다. 나는 사람과의 대화보다 약초와의 대화가 편했다. 말린 잎사귀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고, 유리병 속 용액은 내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사람은 표정을 숨기고 말을 꾸미지만, 약초는 그 성분 그대로 반응했다. 정직함. 그게 내가 약초를 좋아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때 내가 진짜로 꿈꾸던 건 화장수가 아니었다. 의학 연구였다. 특히 만성 통증 환자들을 위한 진통 성분 연구에 관심이 있었다. 관절이 뒤틀린 노인들, 오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이들.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배합을 찾아내는 일. 귀족 영애들의 피부를 매끈하게 만드는 것보다, 병상에 누운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두 가지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전자는 화려함을 다루고, 후자는 절박함을 다룬다. 하지만 자작가의 삼녀에게 그런 연구직은 애초에 선택지가 아니었다. 가문의 서열, 혼사, 사교계에서의 위치. 그 모든 것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궁정약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오히려 그것도 과분하다는 눈치를 주곤 했다. 어머니는 나를 응원해줬지만, 그 응원의 끝은 결국 '궁정약사 시험'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였다. 연구는 학원 졸업생들, 그중에서도 상위권 몇 명에게만 열리는 좁은 문이었다. 나는 그 문 앞에 서보지도 못했다. 문 앞에 서기 위한 자격조차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원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인정하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쓰렸다. 하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세상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선반에서 내렸다. 병 표면에 남은 지문을 소매로 슬쩍 닦아냈다. 캡사이신 추출물의 농도를 살펴보았다. 빛에 비춰보니 색이 진하고 점도가 높았다. 원액에 가까운 농도라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피부 자극 없이 온기만 낼 수 있겠다.' 다만 그대로 쓰면 자극이 너무 강할 것이다. 적정 비율로 희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생각이 정리되자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배합 비율을 머릿속으로 세 가지 버전으로 나눠 그려보았다. 첫 번째는 지속력이 강하지만 향이 약했다. 장시간 온기를 유지하되, 사용감이 심심할 것이다. 두 번째는 향이 풍부하지만 지속력이 짧았다. 처음 발랐을 때의 인상은 강렬하겠지만, 금세 식어버릴 것이다. 세 번째는 둘 사이의 균형을 잡되 제작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다. 균형을 맞추는 일은 언제나 시간을 잡아먹는다. 한서아가 원하는 건 분명 세 번째일 것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오래가는 것. 그게 그녀가 늘 원하는 방향이니까.' 첫인상도 좋아야 하고, 뒷심도 있어야 한다는 것. 욕심이 많은 주문이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좋은 것을 원하니까. 나는 세 번째 방식으로 조합을 시작했다. 말린 히아신스를 곱게 빻아 향유와 섞고, 캡사이신 추출물을 조심스럽게 몇 방울씩 더했다. 작업에 몰두하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에는, 누가 이 성과를 가져가느냐 하는 생각이 잠시 물러났다. 절구 안에서 재료들이 섞이는 소리, 유리 막대가 병 벽을 긁는 소리. 그 단조로운 소리들이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상하다. 이 일 자체는 싫지 않은데.' 싫은 건 일이 아니라, 그 일이 다뤄지는 방식이었다. 과정은 온전히 내 것인데,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 결과가 나왔을 때, 그 결과가 누구의 이름으로 발표되느냐 하는 문제. 이름 하나가 그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나는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나는 조합을 마치고 시험용 소량 시료를 만들어 손목에 발랐다. 피부에 은은한 온기가 퍼졌다. 처음엔 미세한 온기였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번져 나갔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였다. 나는 잠시 그 감각에 집중했다. 손목을 코끝에 가져가 향도 확인해 보았다. 히아신스의 부드러운 향이 캡사이신의 매콤함을 은근하게 감쌌다. '이건 정말 괜찮은 물건이다.' 순간적으로 자부심이 차올랐다. 가슴 어딘가가 잠깐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곧 익숙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걸 만들어봤자, 결국 한서아의 이름으로 발표되겠지.' 이 온기의 조합법도, 이 배합의 균형도, 결국 내 손끝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정면으로 거부할 수도 있었다. "저는 이 일을 맡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해보았다. 말을 내뱉는 순간의 표정까지도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다. 하지만 그 말을 실제로 입 밖에 내는 순간, 나는 궁정 안에서 '까칠한 독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었다. 낙인이 찍히면 인정받을 기회조차 사라진다. 한 번 붙은 평판은 좀처럼 떼어내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이미 여러 번의 시선에서 그 위험을 느꼈다. 작업실을 지나칠 때마다 들려오는 수군거림, 은근한 눈초리.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묵묵히 버티고,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 언젠가는 누군가가 알아볼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조급해하지 말자. 지금은 씨앗을 심는 시기일 뿐이다.'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를 내린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 건 아니다. 결심이 서자 손끝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유리병을 집어 들고 다음 배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섬세하게, 향의 층위를 나눠보기로 했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졌다. 먼지 낀 유리창을 통과한 빛이 재료실 바닥에 노란 줄무늬를 그렸다. 그 햇살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일에 조금이나마 몰입할 수 있었다. 손끝에서 재료들이 섞이고, 색이 변하고, 향이 퍼지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작고, 서투르고,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똑, 똑. 마치 문을 두드리는 것조차 허락을 구하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손에 묻은 가루를 서둘러 털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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