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거절 못하는 천재 약사

2화

송지안은 서류 뭉치를 내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종이 뭉치가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급한 건 아니고, 그냥 내일 아침이면 돼." 급하지 않다는 말과 내일 아침이라는 말이 어떻게 같은 문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송지안의 손톱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궁정약사복도 어제 다림질한 것처럼 주름 하나 없었다. 밤을 새운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저 손으로 밤새 뭔가를 만들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습관처럼 튀어나왔다. 속으로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왜 항상 나한테 오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거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절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이 몰린다. 몰린 일은 다시 몰린 일을 부른다. 이 악순환을 알면서도 나는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송지안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주홍빛 노을이 책상 위 서류 뭉치를 물들였다. 나는 서류를 펼쳤다. 피로 회복용 포션, 세 종류, 재료는 궁정 약초원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다행이다. 밤새 산에 오를 필요는 없겠구나.' 이런 안도가 우습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지난주에는 약초원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 때문에 새벽에 산을 탄 적이 있었다. 이슬에 젖은 풀숲을 헤치고 다니느라 신발이 다 젖었다. 그날 새벽 손끝이 얼어붙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것과 비교하면 이번은 정말로 다행인 셈이었다. 이런 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내 처지가 참으로 서글펐다. 왕립약학원 출신들에게 나는 늘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정규 교육을 통해 이론과 실습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시험은 형식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손에는 실습대에서 얻은 특유의 굳은살이 있었다. 정확하게 같은 위치, 같은 모양의 굳은살이었다. 같은 스승 아래서 같은 방식으로 손을 놀렸다는 증거였다. 나는 달랐다. 내 손에도 굳은살이 있었지만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어머니의 서재에서 낡은 약학서를 붙잡고, 밤마다 촛불 아래에서 혼자 조합법을 외웠다. 실패한 조합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태운 약초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찼던 밤도 여러 번이었다. 그 냄새는 매캐하면서도 시큼했다. 한 번 배면 며칠은 옷에서 빠지지 않는 냄새였다. 어머니는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잔소리 대신 조용히 창문을 열어주셨다. 그 시간을 지나 궁정약사 시험에 합격했을 때, 나는 드디어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걸렸을 때, 나는 정말로 기뻤다. 명단을 확인하러 새벽부터 게시판 앞에 줄을 섰던 기억이 있다. 내 이름을 발견했을 때 옆에 있던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독학 출신이 여기 왜 있지'라는 눈빛이었다. 그때는 그 눈빛의 의미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 기쁨이 지금은 아주 멀게 느껴졌다. 궁정에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시험 합격은 시작점이었을 뿐, 그다음부터는 또 다른 시험이 계속된다는 걸. 왕립약학원 출신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었다. 같은 스승, 같은 강의실, 같은 실습대에서 자란 사람들의 끈. 그 끈에 나는 낄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그들끼리 모여 앉는 자리에는 늘 빈틈이 없었다. 내가 다가가면 대화가 잠깐 멈추고, 다시 이어질 때는 화제가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늘 '독학 출신'이라는 수식어로 소개되었다. 수식어가 붙는 순간, 사람들은 나를 다르게 보았다. 실력이 아니라 배경으로 판단한다는 걸, 나는 여러 번의 미묘한 시선에서 느꼈다. "신기하네요, 학원도 안 다녔는데 어떻게 이걸 다 알아요?" 칭찬처럼 들리는 그 말 안에는 늘 의심이 섞여 있었다. '네가 정말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그 물음에 매번 실력으로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력으로 답할 기회조차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내게 맡겨지는 일은 늘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잡무였다. 정작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에는 처음부터 초대받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조금씩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눈 밑이 퀭한 얼굴로 출근했다. 밤새 포션을 조합하느라 눈을 거의 감지 못했다. 세 종류의 포션을 각각 다른 온도에서 끓이고 식히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초췌했다. 한서아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서윤아! 나 어제 진짜 좋은 아이디어 떠올렸어." 그녀의 눈은 반짝거렸다. 밤을 새운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피부에는 윤기가 흘렀고,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당연하지. 새운 건 나였으니까.' "이번엔 화장수에 은은한 열감을 넣는 거야. 겨울용으로."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웠다. 캡사이신 계열 성분을 극소량 배합하면 피부에 부담 없이 온기를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농도가 너무 낮으면 효과가 미미할 테고, 너무 높으면 자극이 될 것이다. 적정 농도를 찾는 데에 시간이 걸릴 문제였다. 나는 순간 몰입해서 머릿속으로 배합비를 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몰입하는 순간마다 나는 내가 이 일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좋아하는 것과 정당하게 대우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그런 나를 보며 한서아가 활짝 웃었다. "역시 서윤이한테 맡기면 되겠다! 나는 이번에도 큰 방향만 짤게." 큰 방향. 또 그 단어였다. 큰 방향을 짜는 사람과 그걸 실제로 만드는 사람은, 결과가 나왔을 때 완전히 다른 취급을 받는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방향을 짠 사람은 회의실에서 칭찬을 받고, 만든 사람은 다음 서류 뭉치를 받는다. 이 구조는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었다. 정우진이 옆에서 끄덕였다. "서윤 씨, 이번 프로젝트는 궁정 시연회에 올라갈 수도 있대요. 잘하면 좋은 기회예요." 좋은 기회라는 말이 씁쓸하게 들렸다. '좋은 기회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시연회 무대에 설 사람은 아마 한서아일 것이다. 그 결과물을 만든 손은 뒤에 가려질 것이다. 이런 예상이 씁쓸하면서도 이상하게 확신에 가까웠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또 습관처럼 대답이 나왔다. 거절이라는 단어는 내 입안에서 늘 목젖 근처에 걸려 넘어가지 못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본 적은 있었다. 상상 속에서도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서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나자, 나는 다시 홀로 남았다. 서류 위에 적힌 재료 목록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 회복 포션 세 종류, 겨울용 화장수 배합, 그리고 아직 끝내지 못한 지난 시료들. 일정표 위에 새로운 칸이 하나둘 채워졌다. 칸과 칸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주쯤이면 일정표 전체가 빈틈없이 채워질 것이었다. 채워지는 칸을 보며 나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아주 정확했다. 그날 오후, 나는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오늘이 결코 평범한 하루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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