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림자는 그림자였다. 진짜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석실이 나타났고, 그 벽에 걸린 횃불이 그림자를 만들어낸 거였다. 천장까지 닿을 듯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며 나는 잠깐 숨을 멈췄었다. 그게 뭐라도, 살아 움직이는 거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아니, 다행일 리가.
석실 안은 냉기가 감돌았다. 벽돌 하나하나에 이끼가 슬어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핏자국처럼 보이는 얼룩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것인지, 무언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형!"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뛰어오고 있었다.
도현이었다.
"너도 여기 있었어?"
말이 헛나왔다. 반가움보다 당혹감이 먼저 튀어나왔다.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본 얼굴을, 이런 곳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도현은 나를 껴안았다. 옷깃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연습실 냄새, 무대 조명 냄새.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목 뒤가 저릿했다. 몇 년을 같이 살다시피 한 사이였으니까.
"형 죽는 줄 알았어. 그날 옥상에서, 나 진짜..."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도현의 어깨를 잡고 떼어냈다. 손끝에 닿는 어깨뼈가 여전히 가늘었다.
"괜찮아. 이렇게 살아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말이 올라왔다. 니가 왜 여기 있냐고. 니 스캔들 뒤집어쓰고 내가 어떻게 됐는지 알면서, 니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우냐고. 옥상에서 떨어진 게 누구였고, 그 뒤로 기자들 앞에 서야 했던 게 누구였는지, 도현이 정말 모르진 않을 텐데.
삼켰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도현의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게 더 짜증났다. 이럴 때마다 나는 참는 쪽이었고, 도현은 우는 쪽이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신도님."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갑옷을 입은 여자와 남자 둘이 서 있었다. 은빛 갑옷 위로 반사된 횃불이 그들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를 그렸다.
"저는 설아입니다. 저 옆은 재민이고요."
설아라는 여자가 짧게 목례했다. 짙은 눈매에 단단한 인상이었다. 재민은 무뚝뚝하게 고개만 까딱였다. 팔짱을 낀 채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지휘를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으신 대로예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지휘라니. 나흘 전만 해도 무대에서 넘어질까 걱정하던 사람인데. 안무 동선 하나 틀릴까 봐 손끝이 떨리던 인간한테 지휘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권능은 확인하셨습니까?"
"아직요."
설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걱정보다는 의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재민도 옆에서 나를 다시 한번 훑었다.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자기 힘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는 눈빛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도현이 옆에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은은한 빛이 손바닥 문양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이런 거 생겼어. 빛을 뭉쳐서 던지는 거."
[권능 : 광탄]
짧은 시연이었다. 손끝에서 작은 빛 구슬이 튀어나가 벽에 부딪혔다.
퍽.
먼지가 조금 일었다. 벽에 작은 흔적이 남았다.
"멋있지."
도현이 웃었다. 예전에 무대에서 자신 있게 웃던 그 표정이었다. 팬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을 때 짓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나는 웃어주지 못했다. 대신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무 문양도, 빛도 없었다. 이 세계는 나한테 뭘 준 걸까. 아무것도 안 줬으면 지휘고 뭐고 다 도현한테 넘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확인은 나중에 하죠."
설아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석실 안쪽 통로로 걸음을 옮기며, 노신관이 남긴 지도를 펼쳤다. 낡은 종이에 붉은 선으로 표시된 구역이 있었다. 손끝으로 만져보니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부스러질 것처럼 낡아 있었다.
"이상현상이 시작된 지점이 여기예요."
설아가 손끝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이상현상이 정확히 뭔데요."
"신전 지하 유적에서 신도들이 실종됐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흘 전부터."
"몇 명이나."
"열둘."
숫자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열두 명. 지구식으로 치면 한 팀의 인원보다도 많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수색은 안 했어요?"
"했습니다. 신전 병사 셋을 보냈는데, 그 셋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재민이 처음으로 말을 얹었다.
"그래서 저희 셋이 온 겁니다. 신도님을 모시고."
모시고, 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렸다. 모실 사람이 필요한 건 나였는데.
걸음을 옮길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입김이 하얗게 서렸다. 도현이 슬쩍 내 옆으로 붙었다. 나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갔다.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처음엔 장식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규칙적인 패턴을 가진, 무언가의 결계처럼 보이는 문양이었다. 눈앞에서 문양 하나가 깜빡이더니 사라졌다.
"저거 방금..."
재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기 손잡이를 꽉 쥔 손등에 힘줄이 섰다.
"봤습니다. 저도."
설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문양이 하나둘 지워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이 유적 자체를 갉아먹는 것처럼. 벽을 따라 걸으며 세어봤다. 하나, 둘, 셋. 지나온 자리마다 문양이 사라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저게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결계가 풀립니다. 이 유적은 원래 뭔가를 봉인하기 위해 세워진 곳입니다."
설아가 대답했다. 말투는 침착했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도현이 내 옆으로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형, 나 이상한 느낌 들어."
"나도."
짧게 대답했다.
지구에서도 그랬다. 스캔들이 터지기 전날, 이상하게 조용한 하루였다. 매니저가 웃으며 스케줄을 확인해주던 그날, 나는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했었다. 회사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음 앨범 콘셉트를 얘기하던 그 평범한 오후. 그 다음 날 모든 게 무너졌다.
그때는 눈치채지 못해서 당했다.
이번엔 눈치챘다. 그런데도 몸이 굳었다.
왜 이래야 하지.
한 번 겪었으면 됐지, 왜 또 이런 예감이 드는 건지.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아무 권능도 없는 손바닥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통로 끝, 어둠 속에서 무언가 숨소리를 냈다.
크고, 낮고, 젖은 숨소리였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물속에서 숨을 고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설아가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재민이 무기를 뽑았다.
철커덕.
칼날이 횃불 빛을 받아 짧게 번쩍였다.
도현의 손바닥에서 빛이 맺혔다. 은은한 빛 구슬이 손끝에서 부풀어 오르며, 도현의 얼굴에 파리한 그림자를 얹었다.
나는 아무 권능도 없이 그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쥔 것이라곤 노신관이 남긴 낡은 지도 한 장뿐이었다. 지휘관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너무 초라한 무기였다.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통로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가 뒤섞였다. 발톱인지 손톱인지, 돌바닥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눈이 떠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섯 개였다.
각각의 눈이 서로 다른 높이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눈들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숨이 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