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심장이 멈추는 순간, 나는 옥상 난간을 붙잡고 있었다.
비가 왔다. 차가웠다.
빗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려 등줄기까지 젖어들었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난간을 움켜쥐고 있었는데도, 발끝은 벌써 허공을 향해 기울어 있었다.
"이하준, 너 이 새끼, 어떻게 나한테 이래."
형이라고 불렀던 사람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붙어 있었다. 비에 젖은 목소리였는데도 이상하게 선명했다.
강태호. 10년을 형이라 불렀다.
10년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그가 판 것은 내 통화 녹음이었다. 그가 웃으며 나를 지켜준다고 했던 그 입으로. 술자리에서 취해서 뱉었던 말들, 회사 욕, 상사 욕, 별거 아닌 농담들이 편집되고 잘려서 인터넷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걸 판 사람은 다름 아닌 강태호였다.
왜, 라는 질문조차 사치스러웠다. 이미 벌어진 일에는 이유가 필요 없었으니까.
비틀거렸다. 발끝이 허공에 걸렸다.
떨어진다.
그런데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시간이 늘어지는 듯한 감각이 있었다. 몸은 분명 아래로 기울었는데, 세상이 잠깐 정지했다. 소리도, 빗방울도, 심장 소리도.
암전.
눈을 떴을 때는 빛이었다.
하얗고, 지나치게 조용한 빛.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떠 있었다. 발밑에 아무것도 없었다. 중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나는 그저 그 빛 속에 부유하고 있었다.
이게 죽음인가. 그렇다면 죽음은 생각보다 조용하구나.
"깨어났군."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은빛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갈한 이목구비, 눈동자는 색이 없는 것처럼 투명했다.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가 결여된 얼굴이었다. 표정은 있는데 감정은 읽히지 않는, 그런 얼굴.
"여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목이 잠겨서 그런지, 아니면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신전이다. 그리고 너는, 이제 신도다."
신도. 그 단어가 낯설게 귓가에 박혔다.
남자가 내 손을 잡았다. 거부할 틈도 없이 손바닥에 뜨거운 것이 박혀 들어왔다.
지지직.
살갗이 타는 소리가 났는데 아프지가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 감각적으로는 뜨거움을 느껴야 했는데, 통증이라는 신호가 아예 도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 낯선 문양이 새겨졌다. 소용돌이 같기도 하고, 짐승의 발톱 같기도 한 문양이었다. 은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그것을 신문이라 불렀다.
"이게 뭔데요."
"살아남을 자격."
대답이 짧아서 더 무섭게 들렸다. 은결의 목소리에는 억양이 거의 없었다. 감정을 배제한 채로 사실만을 전달하는 느낌이었다.
[신도 각성 — 권능 : 미확인]
눈앞에 떠오른 글자를 보고 나는 실소했다. 이게 뭐야, 게임 창이냐.
"장난이죠, 이거."
"장난이었으면 좋겠군."
은결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 무표정이 오히려 이 상황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문양은 여전히 옅은 빛을 내며 살갗에 박혀 있었다. 지구에서는 이런 걸 문신이라고 부르지, 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 이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신관이라는 사람들이 나를 끌고 간 곳은 거대한 문 앞이었다. 돌로 된 문에는 짐승의 발톱 같은 흠집이 죽죽 나 있었다. 문의 크기만 봐도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3층 건물 높이는 될 것 같았다.
"오늘 임무의 지휘는 이하준, 네가 맡는다."
백발의 노신관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저 방금 여기 왔는데요."
"안다."
"권능이 뭔지도 몰라요."
"그것도 안다."
노신관의 눈에는 동정도 미안함도 없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눈이었다. 마치 오늘 날씨를 말하듯이, 나의 무지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넘어가는 그런 태도였다.
"신도 중 직급이 가장 높다. 그러니 지휘한다. 이 세계의 규칙이다."
"직급이 왜 저인데요."
"신문이 가장 짙다."
말이 안 되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 세계에선 그게 논리였다. 마치 아무도 이 규칙에 반박하지 않는 것처럼, 노신관의 말투에는 확신만이 담겨 있었다.
속이 뒤틀렸다. 지구에서도 이랬다. 아무 준비도 안 된 채로 무대에 올라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도 이렇게 속이 뒤틀렸었다. 신입 사원 첫날, 발표 자료를 준비도 못 했는데 갑자기 프레젠테이션을 하라고 했던 그날처럼.
"제가 못 하겠다고 하면요."
"그럼 여기서 죽는다. 임무를 거부한 신도는 신전 밖으로 추방된다. 밖은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많은 땅이다."
선택지가 없는 선택이라니. 이것도 어디서 겪어본 기분이었다. 강태호가 내 등을 밀었던 그 순간처럼, 결국 나에게 남은 건 하나의 길뿐이었다.
"좋아요. 하죠."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순간에는 그게 편했다. 무대에 오르는 기분과 비슷했으니까. 이미 떨어지기로 결정된 무대라면, 최소한 내 발로 걸어 올라가는 게 나았다.
노신관이 손짓하자 거대한 문이 갈라지듯 열렸다.
철커덕.
돌과 돌이 맞물리는 소리가 신전 전체를 울렸다.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비릿하고 축축한, 살아 있는 것의 냄새와 죽어가는 것의 냄새가 뒤섞인 그런 바람.
"동료가 될 신도들은 이미 안에서 대기 중이다."
동료. 그 단어에 잠깐 숨이 걸렸다.
지구에서는 동료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았다. 강태호도 처음엔 동료였고, 그 다음엔 형이었고, 마지막엔 나를 판 사람이었다. 이 단어를 다시 믿어도 되는 걸까.
"몇 명이나 되죠."
"셋."
"이번 임무 난이도는요."
노신관이 처음으로 표정을 바꿨다. 아주 살짝, 입가가 굳었다. 그 미세한 변화가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만들었다.
"모른다. 처음 겪는 이상이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벽을 훑고 지나갔다.
거대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문 자체보다도 그림자의 폭이 넓었고,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 그림자의 크기를 보고, 숨을 삼켰다.
저게 넷 중 하나라면.
머릿속으로 계산이 안 됐다. 저런 게 넷이나 있는 곳에, 신문 하나 새겨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지휘를 맡아야 한다니.
나는 오늘, 여기서 죽는 걸까.
문 안쪽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사람의 것 같은,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낮게 깔린 숨소리였다.
발이 저절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문턱을 넘은 뒤였다.
돌아갈 곳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