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처형당한 얌전한 딸

5화

"언니." 이서인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갈라졌다. "여기서 뭐 해?"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당황했다는 걸 숨기려고 애쓰는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입가에는 웃음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 이중적인 표정이 낯설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저 애는 늘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산책 중이었어."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는?" "강 공자님이랑 잠깐 이야기 중이었지." 이서인이 그의 팔을 슬쩍 잡으며 웃었다. "우리 둘이 어릴 때부터 친했잖아, 언니도 알지?" 알았다. 회귀 전에도 그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그게 그냥 남매 같은 친분이라고만 생각했다. 세자궁 근위무사와 공작가의 둘째 딸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사실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 '친분'이라는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숨어 있는지, 지금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강윤재는 이서인의 손이 닿는 순간, 아까 나에게 보였던 경직된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지었다. 부드러워진 눈빛, 편안해진 어깨선. 손끝 하나 닿았다고 저렇게 풀어지는 사람이었나. 나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방금까지도 나를 경계하듯 품 속을 감싸던 손이, 이서인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늘어져 있었다. 병. 그의 품 안에 있던 그 이상한 색깔의 병. 지금 저 손이 얼마나 편안한지를 보면, 방금 전 그 경계심이 오직 나를 향한 것이었다는 게 더 분명해졌다. "그러셨나 보네." 나는 짧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더 있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괜히 캐물어봤자 저 둘의 얼굴에 웃음만 더 짙어질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발걸음은 느긋했지만 생각은 그렇지 못했다. 강윤재가 품에 숨긴 병. 이서인과의 은밀한 관계. 그리고 세자가 서서히 갉아 먹히고 있는 독. 모든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고 있었다. 아직 그림 전체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조각들이 같은 그림의 일부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설령."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화분에게 물었다. "강윤재가 뭔가 병을 숨기고 있었어. 이상한 색깔의 액체였는데, 최음제일 수도 있어. 그게 이서인이랑 관련 있는 거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높다." 설령이 대답했다. "암시장에서 은밀히 거래되는 물건 중 그런 색을 가진 것들이 있다. 대부분 값이 비싸고, 신분이 드러나선 안 되는 자들이 사들이지." "근위무사가 그런 걸 왜 사겠어. 세자를 지켜야 할 사람이." "지키는 사람이라고 반드시 충성스러운 건 아니다." 설령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자가 가장 위험한 자다." 그 말이 오래도록 귀에 남았다. 나는 화분 앞에 쭈그려 앉아 잎사귀 하나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세자 곁을 지키는 사람이 정작 세자를 해치고 있다면, 그것보다 더 잔인한 배신이 있을까. 회귀 전의 나였다면 이런 걸 알아채지도 못했을 거다. 그때는 그저 궁 안 소문에 귀 기울일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이번 생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늦으면 죽는 건 세자만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났다. 세자궁 시녀를 통해 매일 전달하던 해독차가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몸이 좀 나아지나 보다, 정도였는데 갈수록 뚜렷해졌다. 세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뺨에 핏기가 돌았고, 눈 밑 그늘도 옅어졌다. 서재에서 몇 번 더 마주쳤을 때, 세자는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인사였고, 그다음엔 짧은 목례였다가, 이제는 나를 보면 걸음을 잠깐 멈추곤 했다. "이 영애가 준 그 차, 확실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세자가 말했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 "약초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요."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설령의 존재를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화분이 말을 한다고 하면, 세자는 나를 걱정할 게 아니라 의원을 불러야 할 거다. "이 영애는 다른 귀족 영애들과 좀 다르시군요." 세자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보통은 이런 데 관심 없을 텐데. 자수나 시서화면 몰라도." "저는 좀 별종이라서요."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별종이라는 말이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다. 설명하기 곤란한 모든 것을 그 한마디로 덮을 수 있었으니까. 세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지만, 그 안에 신뢰 비슷한 게 담겨 있었다. 회귀 전에는 절대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그때의 세자는 나를 볼 때마다 형식적인 예의만 갖춘 얼굴이었지, 저런 눈으로 웃어준 적은 없었다. 그 신뢰가 쌓여갈수록, 반대로 불안해지는 것도 있었다. 이렇게 눈에 띄게 좋아진 세자의 안색을, 궁 안의 누군가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좋아진 원인을 캐묻기 시작하면, 그 끝에 있는 건 결국 나였다. 그리고 그 불안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현실이 되었다. 다이앤이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문을 여는 손이 떨리고 있었고, 숨은 이미 턱까지 차 있었다. 나는 그 얼굴만 보고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공작부인께서 세자궁 시녀를 불러다가 캐물으셨대요. 아가씨가 매일 뭘 보내고 있었는지, 전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부, 라는 그 두 글자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전부 캐물었다는 건, 이미 손수건도, 그 안에 든 마른 잎도, 매일 반복된 심부름도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시녀가 뭐라고 했는데." "모르겠어요. 아직 소식이 없어요." 다이앤이 고개를 저었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작부인께서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신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니가 서 있었다. 손에는 내가 세자궁에 보냈던 손수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 안에 남아 있던 마른 잎이, 어머니의 손에서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방 안의 다른 모든 소리를 지워버렸다. 어머니의 눈은 나를 정확히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차가운지, 방 안 온도가 순식간에 내려간 것 같았다. "이서연." 어머니의 목소리가 방 안 공기를 얼려버릴 만큼 차가웠다. "이게 대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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