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처형당한 얌전한 딸

1화

독을 삼키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버지의 등이었다. 돌아선 등. 그게 다였다. 한산 공작은 딸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떠오른 건, 어릴 적 아버지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했던 말이었다. "서연아, 너는 한산의 얼굴이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부끄럽지 않게. 그 말을 지키려고 나는 스무 해를 살았다. 그런데 지금 저 등은, 부끄러운 딸을 버리는 등이었다. 결백을 증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세자 저하를 독살하려 한 대역죄인, 한산 공작가의 장녀 이서연을 참하라." 형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억울하다는 말은 이미 수백 번 했다. 관아에서, 문초당하는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어머니 앞에서도. 이제는 입도 떼지 않았다.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목이 아플 정도로 소리를 질러도, 세상은 이미 나를 죄인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구경거리 삼아 몰려든 백성들, 저 뒤에서 눈을 피하는 시녀들, 그리고 그 앞줄,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서 있는 이서인. 독배가 입술에 닿는 순간, 이서인의 얼굴이 보였다. 분홍빛 금발, 분홍색 눈동자. 천사 같은 얼굴로, 그 애는 울고 있었다. 언니가 안됐다는 듯, 두 손을 모으고 손수건까지 눈에 갖다 대며. 정작 그 독을 세자궁 찻잔에 탄 건 자기였으면서. 그래, 웃기지도 않지. 어릴 때는 그 애가 진짜 천사인 줄 알았다.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 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언니 언니 부르던 아이. 언제부터 저런 얼굴로 사람을 속일 수 있게 됐는지는 모른다.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저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못 본 것뿐일 수도. 독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났다. 뜨거운 게 아니라 차가웠다. 몸속 깊은 곳부터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발끝에서 시작된 냉기가 무릎을, 배를,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눈앞이 하얘지고, 다리가 풀렸다. 죽는구나. 그것도 하지도 않은 일로.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억울함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배고프다는 거였다. 죽기 전에 밥이라도 한 끼 제대로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내가 한심했지만, 정말로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비단 이불의 감촉이 낯설게 손끝에 닿았다. 천장의 문양도,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도 모두 익숙했다. 내 방이었다. 한산 공작가, 내 침실. 열 살 이후로 십 년 넘게 지냈던, 손등에 흉터가 어디 있는지도 외울 만큼 익숙한 그 방. 죽었는데. 분명히 죽었는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이 떨렸다. 목이 아직도 뜨거웠던 것 같은데, 만져보니 아무 상처도 없었다. 숨은 잘 쉬어졌다. 심장도 뛰고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쿵쿵 울렸다.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뭐지, 이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팠다. 아프다는 감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반가웠다. 죽은 사람은 아픔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창밖을 보니 벚꽃이 반쯤 핀 정원이 보였다. 그 벚꽃, 기억이 났다. 처형당하기 정확히 그날 아침에도 저렇게 피어 있었다. 절반쯤 핀 채로, 바람에 흔들리던 그 모습까지 똑같았다. 설마. 설마 이게, 그날인가. 다이앤이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손에는 아침 세숫물을 받친 대야가 들려 있었다.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오늘 세자궁 다과회 준비하셔야죠." 세자궁 다과회.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이었다. 정확히 그날. 세자가 독이 든 차를 마시고, 그 죄를 내가 뒤집어쓴 바로 그날의 아침. 몇 번이고 되짚어봤던 그 하루. 다과회에서 나온 뒤 세자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고, 내가 준비한 찻잔에서 독이 나왔다고 했고, 그다음은 재판도 없이 나 혼자만 죄인이 됐다. "다이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오늘이, 오늘이 며칠이지?" 다이앤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대야를 든 손이 살짝 흔들렸다. "삼월 열이레잖아요,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삼월 열이레. 내가 죽은 날, 정확히 그 아침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이앤이 다가와 이마를 짚으려는 걸 손으로 막았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잠깐 나갔다 올게." 다이앤이 뭐라 묻기 전에 침대에서 내려섰다. 발바닥에 닿는 마룻바닥의 냉기까지 생생했다. 이게 다 진짜라면. 진짜로 돌아온 거라면. 확신이 필요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확신. 나는 창가로 다가가 화분에 심긴 약초를 만졌다. 어머니가 손님 접대용으로 키우라고 시킨 관상용 화초였다. 이름도 몰랐다. 그냥 초록색 잎이 무성한 풀이었다. 딱히 손댈 이유가 없었는데도, 왠지 그 화분에 눈이 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잎이 반짝거려 보였다면, 그것도 착각이었을까. 손끝이 잎에 닿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왔구나." 나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다이앤은 아침상을 준비하러 나간 뒤였다. 그런데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다. 앳되고 맑은, 여자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방 안을 두 번이나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누구야." 내가 물었다. 화분을 향해서. 정말로 화분을 향해서 말을 걸고 있었다. 미친 게 아닌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모자라 이제는 화분이랑 대화를 하고 있으니,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나는 설령(雪鈴)이라 불려. 네가 살아난 이유를 말해주려고 기다렸다." 화분의 잎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살아난 이유. 그 말을 듣는 순간, 죽기 전에 봤던 아버지의 등, 이서인의 눈물, 세자궁 다과회, 모든 것이 한 줄로 이어졌다. 우연이 아니라는 걸, 이 목소리가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세자 저하가 위험하다는 거지." 내 입에서 먼저 그 말이 나왔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르게. 화분에서 웃음소리 같은 게 흘러나왔다. "영리하구나." "그럼 나는," 목이 말랐다. "이번에도 그 죄를 뒤집어쓰라는 거야?" "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허무하도록 간단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이번에는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저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가서, 독배를 받아 마시고, 아버지의 등만 바라보다 죽는 일은 다시 없을 거라는. 다시 살 기회가 주어졌다는 걸, 나는 그렇게 알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순순히 죽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문제는, 그 다과회가 몇 시간 뒤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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