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처형당한 얌전한 딸

4화

"서연아."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 냉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머니는 자수틀 앞에 앉아 계셨지만, 바늘은 멈춰 있었다.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었다. "어머니."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가 세자궁엔 왜 갔었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소문이 그렇게 빨리 도는 곳이니까,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궁 안의 담벼락엔 다 눈과 입이 달렸다는 말, 회귀 전에도 지겹게 들었던 말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에 좋은 차를 좀 가져다 드렸어요."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걸 함부로 가져다 바쳐. 만에 하나 저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지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회귀 전에도 똑같았다. 세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은 늘 나였다. 정작 해를 끼친 사람은 따로 있는데도. 그날, 최음제 병이 발견되고 온 궁이 뒤집혔을 때도, 손가락질은 전부 내 쪽을 향했었지. 나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는데. "걱정해서 그런 거예요, 어머니." 나는 순종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걱정이라뇨, 이번엔 확실하게 계산하고 움직이는 거예요. 이번엔 절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라고요. "앞으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공작가의 영애답게 처신해야지, 함부로 세자궁을 드나들며 이상한 걸 바치고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니." 사람들이 뭐라 하겠니. 늘 그거였다. 남들 눈이, 평판이, 명예가. 죽을 때조차 아버지는 딸의 목숨보다 가문의 이름을 더 신경 썼다. 그걸 이미 겪은 나였다. 사약을 받던 그 순간에도, 아버지의 편지에는 사죄 한 줄 없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문장만 적혀 있었다. 이번엔 절대로 똑같이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네,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곤 방으로 돌아가면서 결심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스럽게, 티 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어머니 방을 나서면서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들키면 안 된다. 들키면 이번에도 예전처럼 된다. 발끝이 조급하게 움직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설령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안 걸리고 매일 갖다 줄 수 있을까." "세자궁의 시녀 중 하나를 이용해라." 설령이 대답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 손을 빌려 전달하면 된다." 말이야 쉬웠다. 세자궁에 아는 시녀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자궁이라니, 거긴 개미 한 마리 드나드는 것도 감시당하는 곳인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나 세자궁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다니까." "그러니 지금부터 만들어야지." 설령의 대답은 태평했다. 저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말이야 쉽지……" 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날 밤, 나는 다이앤을 통해 은밀히 사람을 찾았다. 세자궁에서 일하는 시녀 중 다이앤의 사촌 동생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이름은 소하라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리고, 성격이 순박해서 다루기 쉬울 거라는 다이앤의 귓속말에 나는 조금 안심했다. 며칠에 걸쳐 신뢰를 쌓았다. 처음엔 간단한 선물부터 시작했다. 값비싼 비단은 눈에 띄니 안 되고, 소소한 머리 장식이나 간식거리를 챙겨 보냈다. 소하는 처음엔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나는 그 애가 세자궁에서 겪는 고생을 들어주며, 진짜 걱정하는 척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절반은 진짜였다. 세자궁 시녀들 사이의 알력 다툼이 얼마나 살벌한지, 나도 회귀 전에 지겹게 봤으니까. 결국 그 시녀를 통해 매일 차를 전달할 방법을 마련했다. 소하가 아침마다 세자의 처소에 다과를 들일 때, 내가 준 차를 슬쩍 섞어 넣기로 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일이 그렇게 정리되어 가던 어느 날 밤, 나는 우연히 강윤재를 마주쳤다. 정원 구석,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달빛도 나무 그늘에 가려 희미했고, 밤바람에 나뭇잎이 서걱거리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어두운 옷차림으로, 뭔가를 품에 숨긴 채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혹은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강 도령님?" 내가 놀라서 불렀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순간이었지만, 그의 품에서 작은 병 하나가 슬쩍 보였다. 이상한 색의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유리병 표면에 어른거리는 달빛이, 그 안의 액체를 묘하게 붉은빛으로 비추었다. "이 영애가 여긴 왜." 그가 물었다. 목소리에 당황함이 섞여 있었다. "산책 나왔는데요. 강 도령님은 이 시간에 여기서 뭘." "……별일 아닙니다." 그는 서둘러 병을 옷 속에 감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별일 아니라니. 나는 그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회귀 전, 세자궁에서 발견된 최음제 병. 그게 바로 이런 모양이었다는 걸, 재판 기록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유리병의 모양, 마개의 색깔, 그 안에 담긴 액체의 붉은 빛깔까지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 병 하나 때문에 내 목이 날아갔으니까. 강윤재가 저걸 어디서 구했을까. 암시장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목현 백작가 삼남이, 세자의 근위무사가, 왜 밤중에 몰래 그런 걸 품에 숨기고 정원을 돌아다니는 걸까. 근위무사라는 신분은 세자의 처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강 도령님."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거, 저하께 쓰실 건 아니시죠?"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표정을 감추려는 게 너무 뻔히 보였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가 낮게 되물었다. "이 영애께서 함부로 넘겨짚으시면 곤란합니다." 넘겨짚은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맞췄다는 걸, 나는 그의 표정에서 확신했다. 저렇게 당황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말 별일 아니었다면. "곤란한 건 제가 아니라 강 도령님 쪽 아닐까요."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곤 곧바로 후회했다. 너무 몰아붙였나. 강윤재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 방금까지의 당황함은 사라지고, 대신 뭔가를 재는 듯한 냉정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저 눈빛, 뭐지. 그때 정원 저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도령님, 여기 계셨네요!" 이서인이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흔들며 달려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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