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오후, 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괜찮으실까요, 아가씨? 제가 옆에서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오하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이번엔 나 혼자 가야 하는 자리였다.
"괜찮아. 그냥 인사나 나누는 자리일 거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오하린의 손길이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것처럼.
"혹시라도 힘든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웃으면서 넘기세요.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이 제일 잘 어울리니까요."
그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칭찬인지 걱정인지 모를 그 한마디가, 오늘 하루의 무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정원에 도착하니, 유시혁이 벤치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일국의 늦봄 바람이 그의 금발을 살짝 흩날렸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작님께서 부르셨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편하게 앉으세요."
벤치 옆자리를 권하는 손짓에,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정원의 장미 넝쿨이 벤치 뒤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향이 짙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코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웃겼다. 죽어가는 심장 박동과는 별개로, 몸은 참 태평하구나.
"어제 연회, 즐거우셨습니까."
"네, 아름다운 자리였습니다."
무난한 대답. 감정도 정보도 담기지 않은 말.
유시혁이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왠지 불편했다.
시선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무게만으로도 사람을 짓누를 수 있다는 걸 이 순간 다시 깨달았다.
"서연 양, 솔직히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카렌 왕국의 대외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덜컹.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이건, 정치적인 질문이었다.
일반적인 귀족 여성이라면 절대 다루지 않을 화제.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던진 질문일까.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답변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한 분석, 논리적인 반박, 역사적 근거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카렌 왕국이 최근 국경 지역의 세율을 조정한 배경, 그 뒤에 숨겨진 왕실 파벌 간의 알력, 심지어 그 정책이 향후 몇 년간 하일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 — 머릿속 서랍에서 자료가 줄줄이 쏟아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저...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어려운 이야기라서."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유시혁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로 모르십니까?"
집요한 질문이었다.
"네, 정치 같은 건 제가 배울 기회가 없었어서요."
"그렇군요."
그의 목소리에 담긴 뉘앙스를 읽을 수 없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바람이 장미 넝쿨을 흔들며 꽃잎 몇 장을 벤치 위로 떨어뜨렸다. 유시혁은 그 꽃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최근 하일국과 카렌 사이의 곡물 교역 문제, 어떻게 생각하세요?"
또 다른 질문이었다.
이번에는 더 구체적이고, 더 정치적인 내용이었다.
등에서 땀이 흘렀다.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곡물 관세를 낮추면 양국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정치적 명분 때문에 쉽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까지.
심지어 그 논의가 결렬될 경우 어느 지역 농가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지, 그로 인해 어떤 여론이 형성될지도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다. 전생의 습관이란 참 무섭다. 필요도 없는 순간에 이렇게 튀어나오려 하다니.
모든 지식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최대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곡물이요? 그건... 음식 재료 이야기인가요?"
일부러 더 어리숙하게 답했다.
말을 뱉는 순간,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근데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니, 그냥 뻔뻔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순간 정원에 정적이 흘렀다.
유시혁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실망도 아니었고, 확신도 아니었다.
뭔가 더 깊은, 파고드는 듯한 시선이었다. 마치 겹겹이 쌓인 포장지를 하나씩 벗겨보려는 사람의 눈빛 같았다.
"……그렇습니까."
그가 짧게 대답했다.
말이 끊긴 채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 침묵이 견딜 수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최악의 굴욕이었다.
내 지성을 완전히 숨기기 위해, 방금 나는 스스로를 무지한 사람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보인 것이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가 스쳤다. 절대 드러내지 마라, 절대 아는 척하지 마라, 여자는 아는 게 많으면 화를 부른다. 그 말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왜인지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숨긴 게 자랑스러워야 하는데, 왜 이렇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걸까. 마치 내 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지워버린 것 같은 느낌.
"괜찮습니다. 어려운 문제니까요."
유시혁이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런 날씨에는 정치보다 꽃 이야기가 더 어울리지요. 이 장미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 네. 향이 참 좋네요."
억지로 자연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보여준 모습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눈빛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마치 내가 벗어놓은 가면 아래, 진짜 얼굴을 찾으려는 듯한 시선.
대화는 곧 가벼운 날씨 이야기로 넘어갔고, 십여 분 후 나는 정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떠나기 직전, 유시혁이 짧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도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왜인지 겉치레로 들리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 다리가 후들거렸다.
연기는 성공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성공한 연기라면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오히려 발걸음마다 불안이 쌓였다. 마치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놓고, 그 불이 어디까지 타올랐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난 기분이었다.
오하린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얼굴이 창백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그냥... 좀 어려운 대화를 나눴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었다.
오하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차를 끓여 내왔다.
"드세요. 마음이 좀 편해질 거예요."
찻잔에서 올라오는 연한 김이 방 안을 부드럽게 채웠다. 향긋한 허브 냄새가 코끝을 스쳤지만, 마음까지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따뜻한 차를 받아 들며,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 쪽에서, 여전히 유시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찻잔을 든 손이 살짝 떨렸다. 오하린이 그걸 눈치챘는지 조용히 손을 잡아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저택 안에서 시녀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자작님이 정원에서의 대화 이후, 서재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조사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누군가는 그가 서고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래된 문서를 뒤적이고 있는 걸 봤다고 했다. 어떤 문서인지, 어떤 지도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무엇을 조사하는 건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소문이 내 방까지 흘러들어왔을 때, 나는 찻잔을 든 손을 다시 한번 떨어야 했다. 마치 내가 숨겨온 무언가의 실마리가, 이미 그의 손안에 들어가버린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