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쪼르륵.
찻잔에 따라지는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버지의 서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넓고, 차갑고, 나를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책장에는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은 책들이 색깔별로 정렬되어 있었고, 벽에는 역대 후작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초상화들 중 어디에도, 서녀의 얼굴은 없었다. 당연한 거였다. 나는 그 벽에 걸릴 자격조차 없는 존재였으니까.
시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내가 이 방에 마지막으로 불려 온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려 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런 식으로 '불려 온' 적이 없었다. 언제나 시녀를 통해 전달되는 명령이 있었을 뿐, 이렇게 마주 앉은 적은.
"한서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19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낯설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등 뒤에 누가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를 부른 게 확실한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존댓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별채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이 말투는 숨 쉬는 것과 같았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이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저절로 몸에 새겨지는 말투였다.
한도경 후작은 서류 한 장을 책상 위로 밀었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나는 그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종이 한 장에 내 인생이 요약되어 있을 거라는 걸, 이상하게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일국의 은강 자작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확히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뇌가 그 문장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하일국.
우리 카렌 왕국과 삼십 년째 국경에서 창을 겨누고 있는 나라. 어릴 적 별채 창문 너머로 들었던 병사들의 이야기 속, 언제나 '적'이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던 그 나라. 국경 마을이 불탔다는 소식, 병사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문, 그런 것들과 함께 늘 따라붙던 이름.
"……적국으로요?"
겨우 짜낸 목소리가 갈라졌다.
"화친의 상징이 필요하다. 네가 그 역할에 딱이지."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마치 창고에 쌓인 밀가루 포대를 어디로 보낼지 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재고 관리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19년 동안 아버지에게 딸로 인정받지 못했다. 어머니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나는 존재 자체가 수치였다. 명절에도, 가문 행사에도, 나는 늘 그림자처럼 뒤편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국가 대사에 쓸 도구로는 딱 알맞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거였다.
인생이 코미디라면, 이건 3류 시트콤 수준이었다. 그것도 시청률 바닥 찍고 조기종영 확정된 그런 시트콤.
"언제, 떠나게 되나요."
"보름 후다.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지."
보름.
19년을 별채에 갇혀 있던 사람에게 보름은 충분하다는 말이 우습게 들렸다. 아버지에게는 그저 서류 처리 기한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인생을 통째로 갈아엎는 시간인데.
"그리고, 내가 왜 하필 저입니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식 부인의 딸, 한지아가 있는데 왜 서녀인 내가 뽑혔는지.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야만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지아는 왕국에 남아 좋은 혼처를 찾아야지. 너 같은 애를 적국에 보내야 명분도 서고, 손해도 없지 않겠느냐."
너 같은 애.
그 세 글자가 가슴 어딘가를 쿡 찌르고 지나갔다.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예상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를 백 번 해도 실제로 칼을 맞으면 아픈 법이니까.
"……그렇, 군요."
말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목구멍이 뻑뻑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듯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그 짧은 순간의 눈맞춤조차, 나에게는 사치였던 걸까.
"가서 짐이나 챙겨라. 하일국 사람들 앞에서 카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은 하지 말고."
명예. 그 단어가 낯설게 들렸다. 지금껏 나에게 명예라는 걸 챙겨준 적이 있었나, 이 집이.
방을 나서면서 나는 생각했다.
인질.
그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정략결혼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였지만, 결국 나는 볼모로 팔려 가는 것이었다. 화친이라는 명분, 명예로운 결혼이라는 겉치레, 그 안에 숨겨진 건 그냥 거래였다. 후작가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아주 남는 장사.
19년 동안 별채라는 감옥에 갇혀 살았는데, 이제는 국경을 넘어 더 큰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 거였다. 감옥의 크기만 커질 뿐,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게 씁쓸했다.
별채의 복도를 걸으며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하일국. 은강 자작.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남자에게, 나는 팔려 가고 있었다. 얼굴도, 성격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상상하려 해도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후작가의 정원이 보였다.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그 정원에, 나는 단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서녀라는 이유로.
어머니가 죽은 지 3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정원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그래도 별채 안에서만큼은 웃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국경을 넘어 적국의 정원에서 살아야 한다.
웃긴 건, 그 사실이 오히려 조금 설렌다는 거였다.
적국이든 뭐든, 별채보다 나쁠 리는 없으니까.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믿지 않으면 이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복도 끝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지아였다.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 자락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나는 그 소리만으로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19년을 이 집에서 살아온 감각이었다.
"언니, 소식 들었어요? 하일국으로 시집간다면서요."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눈은 웃고 있는데, 그 웃음이 나에게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들었어."
내 목소리는 담담하게, 아니, 담담한 척 흘러나왔다.
"거기 사람들 다 야만인이라던데, 조심하세요. 뭐, 언니는 어차피 별채에서 사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별 차이 없을지도."
지아가 배시시 웃으며 지나쳐 갔다. 그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나는 그 웃음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대응할 힘조차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뭐라고 쏘아붙였어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나는 어떤 결심을 하나 했다.
어디로 가든, 무엇이 되든, 이제 이 집에서는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19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낯선 종류의 해방감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짐을 챙기라는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계속 울렸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나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19년을 산 방에, 정작 내 것이라고 할 만한 물건은 몇 개 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가 남긴 낡은 목걸이 하나, 손수 지은 옷 몇 벌,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준 낡은 인형 하나. 그게 내가 19년 동안 쌓은 삶의 전부였다.
별채로 돌아가는 복도가 오늘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방문을 열자, 낡은 침대와 작은 책상, 그리고 창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서 보름 후면 완전히 떠난다. 그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아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일국.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게 무엇일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적국의 자작이라는 남자가 어떤 사람일지, 나를 어떻게 대할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곳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다독임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지는, 국경을 넘고 나서야 알게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