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연회장은 화려했다.
샹들리에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조각들이 저마다 빛을 쪼개내며 바닥에 무지개 조각을 흩뿌리고 있었다.
돈 지랄 보소.
이 정도면 조명 값만 해도 우리 카렌 왕궁 반년 예산은 훌쩍 넘길 것 같은데.
"눈이 즐겁네."
오하린이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순수한 감탄과, 동시에 이 화려함 속에서 우리 둘이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에 대한 자각이 함께 묻어 있었다.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연회장 구석, 기둥 뒤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무지하고, 얌전하고, 그저 예쁜 인형처럼.
그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야 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긴 대본이었다. 표정은 부드럽게, 말은 짧게, 눈은 아래로.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모르는 척.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연기 오디션 봐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리허설을 했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금색 머리카락이 조명 아래 부드럽게 빛났고,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온화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넓은 어깨, 단정한 얼굴선. 누가 봐도 첫눈에 호감을 살 만한 외모였다.
저 사람이구나.
은강 자작, 유시혁.
내 정혼자.
주변 귀족 부인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그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다들 대놓고 쳐다보진 않았지만, 부채 뒤로 소곤거리는 입술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잘생긴 남자 하나가 연회장에 등장했다, 정도의 스캔들이겠지.
그가 다가오는 순간, 나는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걸 느꼈다.
낯선 긴장이었다.
뭐지, 이거. 그냥 형식적인 정혼자 상견례일 뿐인데 왜 심장이 오두방정을 떠는 건지.
"한서연 양이시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자작님."
최대한 담백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감사합니다."
짧은 대답. 그 외에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유시혁의 눈빛에 잠시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속으로 생각했겠지.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말이 없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이내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러 자리를 옮겼다.
됐다.
첫 만남은 무난하게 넘겼다.
조용히 배경으로 남는 것. 그것이 오늘의 성공이었다.
옆에서 오하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정도면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데요, 아가씨."
"쉿."
나는 짧게 그녀를 제지했다. 여기서 잡담하다 누구 귀에라도 들어가면 곤란해진다.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계속 벽 쪽에 머물며 사람들의 대화를 흘려들었다.
하일국 귀족들의 화법은 카렌과는 사뭇 달랐다. 좀 더 직설적이고, 논쟁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카렌에서는 다들 예의라는 포장지로 겹겹이 감싸서 말을 하는데, 여긴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한 무리가 최근 곡물 가격 정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올해 북부 수확량이 줄었으니 관세를 낮춰야 한다는 건 당연한 논리 아닙니까?"
"그건 단기적인 시각이지요. 관세를 낮추면 남부 농가들이 타격을 받습니다."
나는 무심코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논리가 허술한 부분이 몇 군데 눈에 들어왔지만, 당연히 입을 열지 않았다.
저기, 그거 관세 문제가 아니라 유통 구조 문제인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입 다물자. 입 다물자. 나는 무지하고 얌전한 인형이다.
속으로 세 번쯤 되뇌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흥미로운 표정이시네요."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유시혁이 어느새 내 옆에 다시 서 있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네?"
"저기 저 대화, 재미있게 듣고 계신 것 같아서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이래서 도박은 하면 안 된다더니. 내 얼굴이 이렇게 정직할 줄이야.
"아, 그냥, 사람들이 열심히 이야기하시는 게 신기해서요."
얼른 무난한 대답을 지어냈다.
유시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뭔가를 살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묘하게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라,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죽였다.
"저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아세요?"
올 것이 왔다.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위험, 위험, 함정 질문 감지.
"음, 잘 모르겠어요. 어려운 이야기라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조금은 멍청해 보이도록 대답했다.
유시혁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실망 비슷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건 실망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다.
뭐랄까, 실망보다는 좀 더 복잡한, 미묘하게 아쉬워하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괜찮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니까요. 대신, 저 정원의 장미가 참 예쁘죠?"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는 붉은 장미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달빛 아래 붉은 꽃잎들이 마치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네, 정말 예뻐요."
무난한 답변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유시혁은 곧 다른 손님들에게 인사하러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넓은 등, 정갈하게 여며진 재킷의 라인. 걸음걸이마저 우아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시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나 역시 그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저렇게 신경이 쓰이지.
그냥 형식적인 정혼자일 뿐인데.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마치 뭔가 잘못 삼킨 것처럼, 콱 막힌 것도 아니고 그냥 신경 쓰이는 이물감.
오하린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얼굴이 좀 이상해요."
"아니야, 괜찮아. 그냥 좀 긴장했나 봐."
대답하면서도, 나는 계속 유시혁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분명 실망도 아니고, 확신도 아닌, 뭔가 파고들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하린은 뭔가 더 물으려다가, 내가 대답할 기분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는지 조용히 입을 닫았다. 대신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곁을 지켰다.
연회는 그 뒤로도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다른 귀족들과의 짧은 인사, 형식적인 눈웃음, 무의미한 스몰토크의 반복.
솔직히 말하면 다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이 드레스 신발은 누가 디자인했는지 모르겠지만 굽 높이가 인간의 발을 고문하기 위한 도구 같았다.
그래도 버텼다. 무지하고 얌전한 인형은 다리가 아프다고 티를 내지 않는다.
오늘의 연회는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회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복도의 촛불들이 바람에 흔들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발걸음 소리만 유독 크게 울리는 조용한 복도였다.
그 정적을 깨고,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자작님께서, 내일 정원에서 잠시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단독으로.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시험은 오늘로 끝난 게 아니었나.
그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실망도 확신도 아닌, 파고들려는 듯한 그 눈빛.
내일 정원에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