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적국의 천재 인질

3화

국경을 넘는 마차 안,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조금씩 낯설어지고 있었다. 카렌 왕국의 초록빛 들판이 사라지고, 하일국의 붉은 지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덜컹.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몸이 한 번 크게 튕겼다. 나는 창틀을 붙잡으며 숨을 골랐다. '아, 이거 은근히 승차감 안 좋네. 중고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전생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는 걸 보니, 나도 참 지치긴 지친 모양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맞은편에 앉은 오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무표정한 얼굴, 첫 만남부터 뭔가 무뚝뚝한 인상이었다. "괜찮아. 그냥, 조금 낯설어서." "그러시겠죠. 저도 그랬어요, 처음 카렌으로 갔을 때." 오하린은 원래 하일국 출신이었다. 어릴 적 후작가로 팔려 왔다가, 덕수 할아버지의 손녀가 되어 자란 아이였다. 이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돌아가는 게 좋지 않아? 고향이잖아." 내 물음에 오하린이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붉은 지붕들이 점점이 흘러가고 있었다. "고향이라고 해도,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아가씨 곁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무심한 듯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위해 남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뭉근하게 저려왔다. "고마워." "뭘요. 어차피 할 일이니까요." 오하린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무뚝뚝했지만, 그 태도가 오히려 편안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짐칸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묘하게 마음을 다독여줬다. 사람이 가진 게 없을수록, 그 없는 걸 지키려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법이니까. "짐이 별로 없는데도 소리는 크네."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잖아요."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오하린이 처음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웃은 건지 아닌지 애매한 표정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일국은 어떤 곳이야?" "음, 아가씨가 살던 곳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예요. 여자들도 학문을 배우고, 상업에도 뛰어들 수 있고요." 순간 심장이 살짝 뛰었다. 여자도 학문을 배울 수 있다니. 카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후작가에서 나는 글을 안다는 사실조차 숨기고 살았다. 책을 읽다가 들키면, 계모는 혀를 끌끌 차며 "여자가 그런 걸 알아서 뭐 하려고" 하고 비웃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웃어넘겨야 했다. 그런데 여기, 국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헬모드로 시작한 게임에서 갑자기 난이도 선택 창이 다시 뜨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곧 나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어머니의 유언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절대 네가 배운 것을 드러내지 마라. 그 순간 너는 이용당하거나, 버려질 것이다.' 그런 자유가 있다 해도, 나는 그걸 드러낼 수 없었다. 적국 자작의 아내로서, 내가 지적인 모습을 보이는 순간,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정략결혼으로 넘어온 여자가 똑똑하기까지 하면, 그건 미덕이 아니라 위협으로 읽히기 십상이었다. "근데 왜 그런 표정 지으세요?" 오하린의 물음에 나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니, 그냥.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다가." "음, 저는 잘 모르지만, 아가씨는 그냥 아가씨답게 사시면 될 것 같은데요." 아가씨답게. 그게 뭔지, 나조차 알지 못했다. 19년 동안 나는 그림자처럼 살았다. 존재감 없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방식으로. 밥은 부엌에서 챙겨 먹고, 방 안에 틀어박혀 책만 붙잡고 있던 시간들.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고, 나 역시 누구도 찾지 않았다. 이제 새로운 나라에서, 나는 또 다른 종류의 그림자가 되어야 했다. 다만 이번에는 스스로 선택한 그림자였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오하린, 부탁이 있어." "네?" "내가 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줘." 오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부족한 사람이요? 아가씨가요?" "응. 그냥, 그런 사정이 있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었다. 아직 오하린을 완전히 믿을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으니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이 살아온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마음은 이미 이 아이 쪽으로 기울었는데, 머리는 아직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아가씨가 뭘 하든, 저는 그냥 옆에 있을게요."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신뢰가 느껴졌다. 나는 처음으로, 이 낯선 여정이 조금은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차는 며칠을 더 달렸다. 밤에는 여관에서 묵었는데, 오하린은 늘 내 옆방을 잡았다. 한번은 새벽에 잠이 깨서 문 밖을 살펴보니, 오하린이 문 앞 복도에 앉아 졸고 있었다. "...뭐 해?" "아, 아가씨. 그냥 혹시 몰라서요." "내 방에서 자면 되잖아. 침대도 넓은데." "괜찮아요. 저는 여기가 편해요." 편할 리가 없는 딱딱한 나무 바닥에 앉아서 편하다는 말을 하는 이 아이를 보며,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감정이 과해지면 곧바로 부끄러워지는 게 사람 마음이라, 나는 얼른 방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마차는 며칠을 더 달려 은강 지역에 도착했다. 자작가의 저택은 카렌의 후작가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아늑한 느낌이 있었다. 붉은 벽돌과 낮은 담장, 정원에는 처음 보는 붉은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돈 지랄까지는 아니어도, 나쁘지 않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오하린이 픽 웃었다. "아가씨도 그런 말 하시네요." "어, 나도 이럴 때 있어."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다. 정원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하일국 특유의 낮고 넓은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카렌처럼 위로 솟은 첨탑 대신, 가로로 넓게 퍼진 건물들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위압감을 주기보다는 편안함을 주려는 듯한 건축이었다. '취향 나쁘지 않은데, 자작님.'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택의 시녀장이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눈빛이 날카롭게 나를 훑고 지나갔다. 마치 물건의 값을 매기는 듯한 시선이었다. "곧 자작님과의 첫 만남 자리가 있을 예정입니다. 사흘 후, 저택에서 환영 연회가 열릴 것입니다." 환영 연회. 그 말에 나는 배 속이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사흘. 겨우 사흘 남았다. 그 사흘 동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연습해야 하고, 어떤 말을 삼켜야 할지.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이제 진짜, 내가 어떤 얼굴로 살아가야 할지 시험받을 시간이 온 것이었다. 연회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은강 자작 유시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남자가, 사흘 뒤에는 눈앞의 실체가 된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여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채였다. 시녀장이 돌아서기 전, 나를 향해 나지막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작님께서는... 낯선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낯선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럼 나는 뭐지. 낯선 나라에서 온, 낯선 여자 아닌가. 그 말이 어떤 의미로 던져진 건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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