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음을 서빙하다

4화

그날 밤이 지나고 며칠이 흘렀다. 며칠이라고 해도 정확한 날짜 감각은 없었다. 창문 없는 방에서는 시간이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낮에는 그 이상한 방에 갇혀 잠을 자고, 저녁이 되면 조끼가 알아서 입혀지고, 밤새 홀에서 접시를 날랐다. 잠에서 깨면 이미 조끼를 입고 있었다. 누가 입혔는지, 언제 입혀졌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처음엔 그게 소름 끼쳤는데 이제는 그냥 아침 인사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그게 더 소름 끼치는 일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집에는 못 갔다. 집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가끔 눈을 감으면 익숙한 천장이 떠올랐다가, 다시 눈을 뜨면 이 방의 낮은 조명이 나를 맞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진짜 살아 있는 건지, 어떤 꿈속에 갇힌 건지 헷갈렸다. 박정만과 김민석과는 조금 가까워졌다. 위기를 함께 넘기다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사람이 죽을 뻔한 자리를 같이 겪으면 말을 놓게 되는 법이다. 그날 사라진 신입 웨이터의 이름을 나는 뒤늦게 들었다. 최승우. 나보다 두 살 어렸고, 여기 온 지 사흘째였다고 했다. 사흘. 나보다 딱 이틀 더 있었던 사람이다. "그럼 최승우씨는..." "묻지 말라니까." 박정만이 접시를 닦으며 답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보고 나는 더 캐묻지 못했다. 저 손이 무슨 일을 봤는지 모르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손이었다. "저 궁금해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하면 다음엔 네 차례야."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궁금함이 목구멍 안에서 그대로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홀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주방 뒤편 창고에서 항아리 냄새가 난다는 얘기였다. 젓갈 냄새.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이 뒤집혔다. 계약서 3조가 다시 떠올랐다. 젓갈 담금형.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이렇게 실감할 줄은 몰랐다. "확인해볼까요." 내가 말하자 김민석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하지 마." "그냥 궁금해서—" "궁금한 걸 참는 게 여기서 오래 사는 법이야." 그의 눈이 진지했다.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궁금함이라는 감정도 사치라는 걸, 여기서는 배워야 했다. 그날 손님은 세 테이블이었다. 다행히 조용한 밤이었다. 나는 실수 없이 접시를 나르는 데만 집중했다. 손이 접시를 놓칠 때마다 심장이 튀었다. 접시 하나가 살짝 기울어질 때마다 나는 숨을 멈추고 다시 균형을 잡았다. 손끝의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밤이 몇 번 반복되자 조금씩 요령이 생겼다. 예를 들면, 눈을 마주치지 않는 법. 손님 얼굴을 보지 않고 접시만 보는 법. 이렇게 하면 눈 깜빡이는 신호를 놓칠 위험이 있지만, 대신 먼저 겁먹지 않아도 됐다. 시선을 접시 위에만 고정하면, 손님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됐다. 몰라도 되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은 몰랐다. 또 하나, 걸음의 속도. 너무 빠르면 무례해 보이고 너무 느리면 답답해 보인다. 하유리는 그 미묘한 속도까지 다 지켜보는 것 같았다. 나는 정확히 3초에 한 발자국 걷는 리듬을 익혔다.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면서 걸었다. 우습게도 그게 도움이 됐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며칠 반복하니 몸이 먼저 그 박자를 기억했다. "너 좀 나아졌다." 박정만이 어느 날 그렇게 말했다. 칭찬처럼 들렸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감정의 방향을 못 찾았다. "어떻게 여태 버티셨어요." "버티는 거보다 요령이 중요해. 셰프는 사실 규칙을 지키면 안 죽여." "규칙이 너무 많잖아요." "많아도 지키면 돼. 그리고 셰프, 노동법은 진짜 잘 지켜. 야근수당 밀린 적 없어. 휴게시간도 꼭 챙겨줘." 그 말이 너무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다. 사람을 젓갈로 담글 수 있는 존재가 야근수당은 정확하게 챙긴다니. 세상에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존재가 있을 수 있나. "이상한 데서 정직하네요." "셰프 나름의 미학이야. 자기가 정한 규칙은 절대 안 어겨. 그러니까 우리도 규칙만 지키면 안전해." "그럼 그 규칙을 어긴 사람은요." 박정만이 잠시 말을 멈췄다. 접시를 닦던 손도 멈췄다. "어긴 사람 얘기는 하지 말자." 안전이라는 말이 이 상황에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도 조금은 미웠다. 안전을 이런 식으로 확인받아야 하는 삶이라니. "규칙 다 알려주세요. 지금까지 아는 거 전부." 박정만이 잠시 고민하다가 하나씩 나열했다. 손님 앞에서 향수 뿌리지 말 것. 붉은 초는 절대 손으로 끄지 말 것. 대신 입으로 불어서 끌 것. 주방 냄비 뚜껑 3개 이상 동시에 열지 말 것. 손님이 준 명함은 절대 뒤집어 보지 말 것. 김민석이 옆에서 하나 더 붙였다. 화장실 세 번째 칸은 절대 들어가지 말 것. "거긴 왜요." "그냥 그래." 그 이상은 설명이 없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게 사는 법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규칙 하나하나가 이상했지만, 지키면 산다는 확신이 조금씩 생겼다. 최승우가 어겼던 규칙, 접시에 손대지 말 것. 그 하나만 지켰어도 그는 아직 여기 있었을지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도 언젠가 모르는 규칙 하나를 어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저 잘 지킬게요." 다짐처럼 말했다. 박정만이 나를 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그렇게 말해." 그 말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다들 그렇게 말했다가, 다들 그렇게 사라졌다는 뜻일까. 그날 밤 근무가 끝나갈 무렵, 하유리가 나를 따로 불렀다. 주방 앞에 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건조했다. "이도현." "네." "너 오늘 실수 없었어."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나갔는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실수 없었다고 인정받는 게 안심이 될 일인가. 이게 정상적인 감정인가. 정상이 뭔지 이제 헷갈리기 시작했다. 칭찬 한마디에 안도하는 내 자신이 낯설었다. "내일부터 큰 손님 받을 거야." "큰 손님이요?" "등급 높은 마녀. 조심해." "등급이라는 게 뭔데요." "몰라도 돼. 알면 더 무서워지니까."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뒷모습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손목의 낙인을 다시 봤다. 여전히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문질러봤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기도 했다. 등급 높은 마녀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금까지 본 손님들도 위험했는데, 그보다 더 높은 등급이라니. 지금까지 만난 손님들의 눈빛, 손톱, 웃음소리가 하나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보다 더한 것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가는 방법을 아직도 몰랐다. 방으로 돌아가는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내일이면 또 무슨 얼굴을 마주해야 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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