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음을 서빙하다

1화

술은 죄가 없다. 마시는 인간이 죄인이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거다. 실제로 전신주와 싸우다 돌아가신 분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날 밤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소주 일곱 병째를 비웠다. 여섯 병째까지는 기억이 난다. 편의점 사장님이 나를 보고 혀를 내둘렀던 것도 기억난다. 일곱 병째 뚜껑을 딴 순간부터가 문제였다. 기억은 거기서 끊긴다. 다음 장면은 낯선 방이었다. 붉은 등이 낮게 걸려 있고, 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촛농처럼 흘러내려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내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손끝이 뻐근했다. 잉크가 아직 덜 말라 있었다. 손을 뻗어 종이를 만졌다. 진짜였다. 꿈이 아니었다. 서명란에 내 이름이 있었다. 이도현. 내 필체였다. 삐뚤빼뚤한 게 딱 술 취했을 때 쓰는 그 글씨체였다. "이게 뭐야." 혼자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숙취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종이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였다. 상단에 큼지막하게 '귀곡정 정식 계약직 웨이터 근로계약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조항이 줄줄이 이어졌다. 글씨가 작아서 눈을 찌푸리고 읽어야 했다. 제1조. 근무 시간은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제2조. 급여는 최저시급의 3배. 제3조. 무단 결근, 탈주, 혹은 업장 내 비밀을 외부에 누설할 경우 즉시 처형한다. 처형 방식은 사측이 선정하며 젓갈 담금형 혹은 육포 건조형 중 택일한다. 세 번째 줄을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글자가 바뀌지 않았다. 혹시 잘못 읽은 건 아닐까 싶어서 손가락으로 글자를 하나씩 짚어가며 다시 읽었다. 젓, 갈, 담, 금, 형. 육, 포, 건, 조, 형. 또렷했다. 오타도 아니었다. "장난이겠지." 말은 그렇게 했는데 손이 떨렸다. 종이 오른쪽 하단에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인장 모양이 눈이었다. 사람 눈. 깜빡이고 있었다. 한 번 더 봤다. 착각이 아니었다. 눈꺼풀이 움직이고 있었다. 콰직. 인장에서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손목이 뜨거워졌다. 소매를 걷었다. 손목 안쪽에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낙인처럼, 살에 파고든 것처럼. 만져보니 아프진 않았다. 그냥 있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문양을 손톱으로 긁어봤다. 지워지지 않았다. 물티슈가 있었으면 닦아봤을 텐데, 방 안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이거 왜 있어."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방 안엔 나 혼자였다. 일단 방을 둘러봤다. 창문은 없었다. 붉은 등 하나, 테이블 하나, 그리고 내가 앉아 있던 낡은 의자 하나. 그게 전부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짐작할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을 밀고 나갔다. 좁은 복도 끝에 주방 냄새가 났다. 기름 튀는 소리, 칼질 소리, 그리고 낮은 웃음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따라 걸었다.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벽에는 액자가 몇 개 걸려 있었는데, 안에 든 그림이 하나같이 눈을 마주치기 싫은 것들이었다. 정신을 차리는 게 우선이었다. 여긴 어디고,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순서대로 알아내야 했다. 주방문을 열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흰 조리복. 머리는 뒤로 단정하게 묶었고,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는데 그 칼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실제로 빛났다. 형광펜처럼. 도마 위엔 뭔가가 놓여 있었다. 형체가 이상했다. 눈을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았다. "일어났네." 여자가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도마 위에서 뭔가를 썰고 있었다. 그게 뭔지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저기, 여기가 어디죠." "귀곡정." "거기가 어딘데요."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눈이 마주쳤는데 몸이 반응했다. 도망쳐야 한다는 신호를 뇌가 대신 보내는 것 같았다. "손목 봐." 나는 소매를 다시 걷었다. 낙인이 아까보다 선명했다. "계약서에 서명했잖아." "제가요? 언제요?" "어제. 새벽 3시. 취해서." "그건 말이 안 되죠. 저는 여기 온 적도 없는데—" "왔어. 걸어서." "제가 왜 여기까지 걸어와요." "몰라. 취해서." 말이 짧게 짧게 끊겼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내가 취해서 뭘 했는지 나도 몰랐다. 지난주에도 편의점 파라솔을 안고 자다가 아침에 발견됐다. 이번엔 스케일이 좀 컸을 뿐이다. 파라솔에서 이런 곳까지, 발전이라고 해야 할지 몰락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저 이거 무효로 해주세요. 저 술 취해서 서명했잖아요. 법적으로 무효예요." 그녀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서늘했다. 웃는데 왜 더 무서운지 이해가 안 됐다. "여긴 그쪽 법 안 통해." "그럼 무슨 법이 통하는데요." "내 법." 칼끝이 도마에 콱 박혔다. 서걱.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에 몸이 굳었다. 도마가 반으로 갈라질 뻔했다. 저 칼이 사람한테 닿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소개할게. 하유리. 여기 오너 겸 셰프." "이도현입니다." 말이 반사적으로 나갔다. 위기상황에서도 인사는 나오는구나.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몸에 박힌 예의범절이 이런 순간에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알아. 계약서에 이름 있으니까." 당연한 걸 왜 말했나 싶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와중에 민망함을 느끼는 내가 제일 이상했다. 하유리가 조리복 앞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은 나비 모양 배지였다. "오늘부터 웨이터. 근무는 6시부터." "저 못 해요. 저 이런 거 처음이고—" "3조 다시 읽어봐." 다시 읽으라는 소리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처형. 젓갈. 육포. 그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어느 쪽이 나을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소름 끼쳤다. "장난 아니죠."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확인받고 싶지 않은 확인이었다. 하유리가 대답 대신 배지를 내 가슴팍에 붙였다. 배지가 살에 붙듯 딱 고정됐다. 떼어보려 했지만 손끝이 미끄러졌다. 몇 번을 더 잡아당겨봤다. 소용없었다. 배지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옷에, 아니 살갗에 눌어붙어 있었다. "6시. 늦지 마." 그녀가 등을 돌렸다.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등 돌린 뒷모습마저 위압적이었다. 조리복 뒷목에 문신 같은 게 살짝 보였는데, 자세히 볼 용기는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손목의 낙인과 가슴의 배지를 번갈아 봤다. 술이 문제였다. 술이 죄가 없다는 말, 취소한다. 술은 죄가 있다. 아주 큰 죄가 있다. 할아버지, 죄송한데 그 명언은 틀렸어요. 창밖을 봤다. 창밖은 없었다. 벽뿐이었다. 여긴 지하인가, 아니면 다른 어딘가인가. 궁금해할 시간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40분이었다. 20분 뒤면 첫 근무가 시작된다. 도망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주방 반대편으로 슬쩍 걸어가 봤다.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문고리 같은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문이 안 보였다. 아까 들어온 문 말고는 문이 없었다. 복도로 다시 나가면 방향을 잃을 것 같았다. 애초에 이 건물 자체가 밖으로 나가는 구조가 아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서서, 나는 처음으로 술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속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방 안쪽에서 누군가 종을 치는 소리가 났다. 땡. 첫 손님이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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