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시야 한쪽에 여전히 남아 있는 스킬창을 확인했다.
[엿보기 마왕의 눈]이라는 문구는 어제와 똑같이 떠 있었다. 잠깐이나마 이게 하루짜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현실은 그런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키는 그 짧은 순간에도, 눈앞 한쪽 구석에는 반투명한 글자가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정도로 뚜렷하게 남아 있으면, 이건 착시나 일시적인 환각 같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여 보았다.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존재감이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균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어제보다 조금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틈이 좁아져 있었다.
어제 이 자리에 서서 느꼈던 그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잠시 다가가는 걸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다잡았다. 확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건, 지난 이 년간 수백 통의 이력서를 넣으면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었다.
손끝으로 균열의 가장자리를 만져보았다. 차가운 시멘트의 감촉만 느껴질 뿐, 어제 느꼈던 그 서늘한 냉기는 훨씬 약해져 있었다. 마치 균열 너머의 무언가가 문을 닫고 있는 것처럼.
틈의 폭을 눈으로 대강 재보았다. 어제는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정도였는데, 오늘은 확실히 그보다 좁았다. 이 속도로 좁아진다면 며칠 안에 완전히 아물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반사적으로 나왔다. 물건의 상태를 보고 값을 매기던 버릇은, 직업을 잃은 지 이 년이 지나도 몸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 변화가 무슨 의미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위협이 당장 다시 닥쳐올 것 같지는 않다는 판단이 섰다. 그 판단 하나만으로도 어깨의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스킬 세부 정보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어제 봤던 문구에 이어, 자세히 보니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추가된 항목이 하나 더 있었다.
[특이사항: 본 스킬은 대통일 던전 이론이 규정한 표준 관측 범위를 초과한 이례적 사례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음. 획득 경위 미상.]
그 문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획득 경위 미상이라는 말은, 이 스킬 창을 만들어낸 시스템조차도 내가 어떻게 이걸 얻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즉 나 같은 사례가 지금까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극히 드물었다는 얘기였다.
대통일 던전 이론이라면 나도 대학 시절 교양 수업에서 겉핥기로 배운 적이 있었다. 게이트와 균열, 각성자와 스킬의 상관관계를 통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이론이었는데, 그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안에 내 경우가 없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수만 건의 각성 사례, 수십만 건의 스킬 발현 기록을 다 뒤져도 나 같은 케이스가 안 나온다는 뜻이니까.
그 사실이 주는 무게는 생각보다 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헌터와 각성자들, 협회의 연구진들, 그리고 게이트 관련 학문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중 누구도 이런 경위로 스킬을 얻은 사례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이 순간, 이 방 안에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 앎이 주는 감각은 이상했다. 우월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낯설고, 두려움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뜨거운 기운이 함께 섞여 있었다. 손끝에 다시 저릿한 감각이 돌아왔는데, 그건 어제의 서늘한 저릿함과는 다른, 오히려 조금씩 뜨거워지는 종류의 감각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을 그제야 알아챘다. 그건 흥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종류의 흥분을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첫 면접 통지서를 받았을 때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전, 수능 성적표를 손에 쥐고 목표했던 대학의 커트라인을 넘겼다는 걸 확인했을 때였을까. 그 이후로는 늘 뭔가를 두려워하거나, 뭔가를 잃어버릴까 봐 조바심을 내는 감정만 있었지, 이렇게 순수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무기력하게 이불 속에서 하루를 흘려보내던 지난 몇 달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각성이 몸속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력서를 백 통쯤 넣어도 연락이 오지 않던 세계에서, 나는 이제 아무도 갖지 못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무언가가 당장 밥벌이가 되어줄 리는 없었다. 헌터 협회에 이 스킬을 신고하지 않는 이상, 이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능력이었고, 존재하지 않는 능력으로는 어떤 계약서에도 서명할 수 없었다. 지식만 있고 그것을 쓸 자리가 없다는 건, 지난 이 년간 몸으로 겪은 진리였다.
경력은 있지만 자격증이 없어서 서류에서 걸러지던 순간들, 자격증은 있지만 경력이 없어서 면접에서 밀려나던 순간들. 그 사이 어딘가에 끼어서 나는 계속 미끄러졌다. 물류 관련 자격증 세 개, 관련 경력 십일 년, 그럼에도 서른 통의 이력서 중에서 면접 연락은 두 건, 최종 합격은 없음. 그게 지난 이 년간 내가 쌓아온 성적표였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이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디에 가져다 대야 값이 나올지, 그 계산을 스스로 해볼 수 있다는 게 달랐다. 예전에는 회사가 정해준 자리에서 회사가 정해준 숫자를 관리했지만, 지금 이 스킬은 오로지 내가 판단하고 내가 값을 매겨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걸 신고하면 협회에서 어떤 등급을 매길까. 신고하지 않고 혼자 키워서 나중에 더 높은 값에 팔 수 있을까. 아니면 이건 아예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팔면 안 되는 위험한 물건일까. 온갖 계산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굴러가기 시작했다.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계산할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오랜만에 느끼는 활력이었다.
나는 스킬창 아래쪽에 붙은 세부 항목을 마지막으로 다시 훑어보았다.
[등급: 판정 불가 / 성장 가능성: 미확인 / 참고: 심연의 지배자로 나아갈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시야.]
심연의 지배자로 나아갈 자격.
그 문구를 읽는 순간, 이 스킬의 이름이 왜 그렇게 조롱조로 붙었는지, 그 이면에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마왕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비웃는 말이 아니라, 이 능력의 종착점을 미리 암시하는 이름일 수도 있다는 생각.
등급이 판정 불가라는 것도 이상했다. 헌터 협회의 등급 체계는 F부터 SSS까지, 아무리 희귀한 스킬이라도 어딘가에 끼워 맞춰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건 그 체계 자체를 벗어난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판정 불가라는 세 글자가, 이 스킬이 지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바깥에 있다는 걸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오랜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옷장을 열어 외투를 꺼내고, 서랍에서 지갑과 실업급여 카드를 챙겼다. 몇 달째 침대와 소파 사이만 오가던 몸이, 오늘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옷장 안쪽에는 아직 정장 한 벌이 걸려 있었다. 마지막 면접 때 입었던 그 옷이었다. 손이 잠깐 그쪽으로 향했다가, 나는 결국 편한 후드티와 바지를 골라 입었다. 지금 필요한 건 면접용 옷이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러 다닐 수 있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의욕이 솟는지, 나 자신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이 균열이, 이 스킬이, 지난 이 년간 내가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다시 돌려주고 있다는 느낌만은 분명했다.
현관문을 열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안방 벽을 돌아보았다.
균열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 방 안의 흐린 아침 햇살이 그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좁은 틈은 이제 그냥 오래된 건물의 흔한 하자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이 방에 처음 들어온다면 신경도 쓰지 않을 그런 균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틈 너머에 여전히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언젠가 다시 나를 부를 거라는 걸.
그리고 그 순간, 현관문 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우리 집 앞을 서성일 만한 사람은 없었는데, 그 발소리는 정확히 우리 집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