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심연을 엿본 자

4화

정신이 든 건 얼마쯤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눈을 뜨자 익숙한 안방 천장이 보였다. 형광등 자리에 붙어 있는 낡은 커버, 그 커버 한쪽이 살짝 깨져 있는 것까지도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그 깨진 자리에서 늘 미세하게 깜빡이던 그림자까지도 그대로였다. 몇 년을 봐 온 천장이라, 눈을 감고도 어디에 얼룩이 있는지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거대한 용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방이 그대로 있었으니까. 몸을 일으키려는데 뒤통수가 뜨겁게 지끈거렸다. 바닥에 쓰러지면서 부딪힌 모양이었다. 손으로 뒤통수를 만져보니 혹이 나 있었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손끝에 만져지는 혹의 크기를 가늠하며, 이 정도면 병원비가 들 일은 아니겠다고 계산하는 자신이, 방금 겪은 일과 지금의 반응 사이의 괴리를 새삼 느끼게 했다. 용을 봤다는 사람이 병원비를 따지고 있다니, 이게 정상적인 반응인가 싶었다. 천천히 상체를 세우고 벽을 돌아보았다. 균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손가락 두 개쯤 들어갈 만한 좁은 틈, 그 안쪽의 어둠도 여전했다. 방 안의 미약한 조명 아래에서도 그 틈만은 유난히 짙어 보였다. 마치 빛이 그 틈 앞에서만 걸음을 멈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안쪽을 다시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까는 무심코, 그저 낡은 벽에 생긴 흔한 균열이라 여기고 들여다본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 너머에 뭔가가, 아니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조명을 가까이 가져가는 대신, 나는 그 자리에서 세 걸음쯤 물러나 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발바닥에 닿는 장판의 차가운 감촉이 그제야 느껴졌다. 그때, 시야 한쪽에 이상한 게 걸렸다. 허공에 반투명한 사각형 창이 떠 있었다. 게임 인터페이스 같은 형태였는데, 그 안에 흰색 글씨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칭호 획득: 심연을 들여다본 자]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환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눈을 감았다 떠도 그 창은 그대로 있었다. 오히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글자의 윤곽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뉴스에서 각성자들이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 이런 창을 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 텔레비전 화면 속, 인터뷰에 응하는 각성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지, 내 눈앞에 뜨는 문장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창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손이 그 사각형을 그대로 통과했다. 만질 수는 없지만 분명히 시야에 존재하는, 실체 없는 정보였다. 손가락 사이로 글자가 그대로 지나가는 감각은 이상했다. 잡히지 않는 걸 잡으려 했다는 헛헛함과,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확신이 동시에 손끝에 남았다. 그 아래로 또 다른 문장이 이어졌다. [스킬 획득: 엿보기 마왕의 눈]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게 이상했지만, 그 스킬명이 너무 어이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엿보기 마왕의 눈이라니. 마치 몰래 남의 방을 훔쳐보는 변태에게 붙여줄 법한 이름이었다. 방금 나는 거대한 용과 눈이 마주치는, 세상 어느 소설에서도 웅장하게 그려질 법한 경험을 했는데, 그 결과로 얻은 능력의 이름이 이렇게 조롱조라는 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라리 '용의 시선을 견뎌낸 자'라거나 '심연을 삼킨 눈' 같은 그럴듯한 이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엿보기라니. 누가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따지고 싶어도 따질 대상이 없다는 게 더 허탈했다. 창을 향해 손짓을 해보니, 세부 정보가 펼쳐졌다. [엿보기 마왕의 눈: 특정 조건 하에 균열이나 게이트 너머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관측할 수 있다. 관측 대상의 정보를 부분적으로 열람할 수 있다. 등급: 판정 불가.] 등급이 판정 불가라는 문구가 눈에 걸렸다. 게이트 관련 뉴스에서 스킬이나 능력은 대개 하급, 중급, 상급, 그리고 극히 드물게 특급으로 분류된다고 들었는데, 판정 불가라는 등급은 처음 들어보는 표현이었다. 하급 스킬도 협회에 등록하면 최소한의 지원금이 나온다고 했고, 상급 이상은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판정 불가라는 건, 그 어떤 기준표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분류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그 기준 자체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순간, 이 상황 전체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가 다시금 실감으로 다가왔다. 수십 년 전 첫 게이트가 발생하고 나서, 인류는 게이트와 던전,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는 몬스터에 대응하기 위한 체제를 정비해왔다. 각성자를 관리하는 헌터 협회가 설립됐고, 게이트는 정부의 감시망 아래에서만 발생하고 통제된다는 게 상식이었다. 뉴스에서 새로운 게이트가 열리면 즉시 경보가 울리고, 반경 몇 킬로미터가 통제선으로 둘러싸이는 장면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학계에서 정립된 대통일 던전 이론에 따르면, 모든 던전은 하나의 거대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가장 바깥쪽인 제1계층만이 인류가 진입해 자원을 채집하는 지배 영역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 이론을 세운 학자의 이름까지도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교양 다큐멘터리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왔던 이론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파트 벽 안쪽에서, 그것도 아무런 경보나 통제 없이, 균열이 생겨나고 그 너머로 던전의 깊은 곳— 아마도 제1계층보다 훨씬 안쪽에 존재할 법한 공간이 들여다보인다는 건, 그 정설 전체를 뒤흔드는 이상 현상이었다. 협회도 모르고, 정부도 모르고, 심지어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조차 모르는 균열이, 내가 매일 잠을 자는 방의 벽 한쪽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다시 벽을 바라보았다. 균열은 조용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벽지 무늬 사이에 섞여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낡은 집의 흔한 흠집으로 여기고 지나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균열 너머에 무언가가 있고, 그 무언가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걸. 손끝에 남은 저릿한 감각이 그 증거였다. 마치 차가운 물속에 손을 담갔다가 뺀 것처럼, 감각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남아 있었다. 그 감각을 지우려고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펴봤지만, 저림은 오히려 조금씩 손목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스킬창을 다시 들여다보며, 나는 이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아니 이걸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헌터 협회에 신고를 해야 하나. 신고 절차는 알고 있었다. 관할 지역 협회 지부에 방문해서 각성 사실을 접수하고, 담당 조사관이 배정되어 능력 검증을 받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 최소한의 지원금과 등급 인증서가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신고를 하면 이 아파트가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고, 나는 조사 대상이 될 거였다. 벽에 구멍을 낸 이유부터, 균열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왜 그동안 신고하지 않았는지까지 하나하나 캐물을 게 뻔했다. 낡은 벽 균열 하나로 시작된 일이 순식간에 내 삶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갔다. 이사를 나가야 할 수도 있고, 소유권 문제가 걸려 있는 이 집을 통째로 협회에 내줘야 할 수도 있었다. 셈은 금방 나왔다. 이득보다 손해가 훨씬 컸다. 그리고 그 계산 끝에서, 나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걸 신고하지 않고 나 혼자 알고 있어야겠다는 결론. 그 결론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능력이, 이 이름 부끄러운 스킬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남들이 갖지 못한 무언가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늘 남이 이미 정해둔 값을 확인하고 매기는 쪽이었지, 남에게 없는 무언가를 가진 쪽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저 벽 틈 하나 때문에, 처음으로 나만이 아는 것이 생겼다. 그 사실이 두려움보다 조금 더 무겁게 가슴에 얹혔다. 균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여전히 손가락 두 개쯤 들어갈 좁은 틈으로,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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