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심연을 엿본 자

2화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건 삼 년 전이었다. 한빛물류에서 받은 퇴직금과 그동안 모아둔 적금을 합쳐 전세 보증금을 마련했는데, 그때는 회사가 곧 무너질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회사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회사에서 잘려나갈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한빛물류는 중견 물류기업치고는 나름 탄탄한 회사였다. 전국에 물류센터 다섯 곳을 운영했고, 대형 유통사와 장기 계약을 맺고 있어서 매출도 꾸준했다. 나는 그 회사에서 신입으로 시작해 자재관리팀에서 십일 년을 일했다. 입고 물량을 예측하고 재고 손실률을 낮추는 게 내 주된 업무였는데, 손실률을 십이 퍼센트에서 사 퍼센트까지 끌어내린 게 내 경력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성과였다. 그 숫자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삼 년을 매달렸고, 그 과정에서 밤을 새운 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숫자로 말하는 법을 배운 게 그 십일 년이었다. 상사에게 보고할 때도, 후배를 혼낼 때도, 심지어 퇴근 후 술자리에서 신세 한탄을 할 때도 나는 늘 퍼센트와 단가로 말했다. 감정은 셈이 안 맞는 언어였고, 숫자는 틀리는 법이 거의 없는 언어였다. 그래서 나는 숫자를 믿었다. 회사가 무너진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성공적인 물류망 때문이었다. 대형 유통사가 자체 물류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결정하면서, 한빛물류가 십 년 넘게 독점적으로 관리해온 배송 라인을 통째로 회수해간 것이었다. 계약이 끊긴다는 소식이 전해진 게 작년 여름이었고, 그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아 회사는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나는 그 반년 동안 회사가 재기할 방법을 찾아 밤낮으로 자료를 만들었지만, 결국 그 자료는 어느 회의실 서랍 속에서 먼지만 쌓이다가 폐기되었다. 그 자료를 만들던 밤들이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다. 손실률 재산정, 대체 거래선 발굴, 인력 재배치안까지, 나는 마치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처럼 매달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순진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거였다. 회사는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있었고, 내 자료는 그 답을 조금 늦추는 핑계에 불과했다. 마지막 출근일, 인사팀에서 준 서류에는 정리해고라는 단어가 아니라 경영상 불가피한 인력 조정이라는 표현이 쓰여 있었다.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이상하게도 화가 나기보다는 허탈했다. 십일 년이라는 시간이 그 한 줄짜리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담담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책상을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계산해본 게 있었다. 십일 년, 사천여 일, 야근 시간을 다 더하면 못해도 이만 시간은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 이만 시간이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종이박스 하나로 환산되는 걸 보면서, 나는 사람의 시간에도 결국 단가가 매겨진다는 걸 알았다. 다만 그 단가를 정하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퇴직금은 생각보다 넉넉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계산이 완전히 틀어졌다. 물류업계 전체가 대형 유통사의 자체 시스템화 흐름을 따라가면서, 나 같은 중간관리자급 인력을 받아줄 자리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력서를 넣을 때마다 경력은 인정받았지만, 그 경력을 써먹을 자리가 시장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는 것과 쓸 자리가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고, 나는 그 차이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면접을 본 곳이 열두 군데였다. 그중 서류를 통과한 곳이 다섯, 최종면접까지 간 곳이 두 곳, 합격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 숫자를 세어보는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문제는 이제 이 숫자들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예전에는 숫자가 성과였고, 지금은 숫자가 그냥 실패의 목록이었다. 한 해가 지나면서 퇴직금은 절반 아래로 줄었고, 실업급여로 근근이 버티는 지금의 생활이 시작됐다. 이 낡은 아파트도 사실 전세에서 월세로 바꾼 지 육 개월이 채 안 된 곳이었다. 보증금을 까먹으며 버티느니 차라리 월세로 전환해 남은 돈을 지키는 게 낫다는 계산이었는데, 그 계산이 맞았는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세에서 월세로 바꾸던 날, 집주인은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요즘 다들 그렇게 사는데예, 뭐 어쩌겠습니꺼." 그 말투에는 위로도 조롱도 아닌, 그냥 무심함만 있었다. 나는 그 무심함이 오히려 편했다. 누군가의 동정을 받는 것보다 그냥 흔한 일로 취급되는 게 덜 아팠다. 벽의 균열을 처음 본 게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사 올 때만 해도 벽지는 깨끗했다. 관리사무소에서 도배를 새로 해줬다고 들었는데, 육 개월쯤 지나면서 안방 벽 아래쪽에 조금씩 얼룩이 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곰팡이인가 싶어 신경 썼는데, 자세히 보니 얼룩이 아니라 벽지 자체가 아래로 살짝 부풀어 오른 형태였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별생각 없이 넘겼다. 오래된 아파트니까, 배관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거나 곰팡이가 슬었겠거니 했다. 관리사무소에 말하면 사람이 와서 봐줄 거고, 그러면 또 며칠은 공사 소음을 들어야 할 테니 귀찮은 일이 하나 늘어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걸 그냥 못 본 척 미뤄두었다. 그날 오후, 나는 다시 그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부풀어 오른 벽지 끝이 살짝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시멘트가 아니라 시커먼 어둠이 보였다. 손끝으로 벽지를 살짝 눌러보니, 예상보다 훨씬 물렁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치 벽 뒤에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처럼. 손끝에 닿은 그 물렁함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시멘트벽은 원래 단단해야 하는 거였다. 십일 년을 물류센터에서 일하며 벽과 바닥, 선반의 강도를 눈으로 가늠하는 게 습관이 된 나였다. 그 감각이 지금 이 벽 앞에서 완전히 틀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까 하다가, 나는 그냥 벽지를 조금 더 뜯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었고, 이 작은 사건이 그날의 유일한 사건이 될 것 같았으니까. 손톱으로 벽지 끝을 살짝 잡아 뜯자, 생각보다 쉽게 종이가 떨어져 나갔다. 그 아래로 드러난 시멘트벽에는 손가락 두 개쯤 들어갈 만한 균열이 나 있었는데, 그 균열의 안쪽은 이상할 만치 깊었다. 보통 이 정도 크기의 벽 갈라짐이라면 안쪽에 콘크리트 골재나 배관이 보여야 정상인데, 그 균열 안쪽은 아무리 눈을 갖다 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조명 문제인가, 아니면 내 시력이 이상해진 건가 싶어서 균열 옆의 벽지도 다시 살펴보았다. 벽지 옆쪽은 여전히 평범한 시멘트 표면이었다. 문제는 오직 그 균열 안쪽, 그 좁은 틈 하나뿐이었다. 스탠드 조명을 가져와 균열 안쪽을 비춰보았다. 빛이 들어가는 대신, 오히려 그 빛이 삼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균열 너머에 완전한 어둠이 존재하고, 그 어둠이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조명을 각도를 바꿔가며 몇 번이나 다시 비췄다. 결과는 똑같았다. 빛이 균열 입구에서 딱 멈추듯 사라졌고, 그 안쪽은 여전히 새까맸다. 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광경이었다. 빛은 반사되거나 통과하거나 흡수되는 것 중 하나여야 하는데, 이건 그 셈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그림이었다. 이상한 냉기가 균열 틈으로 흘러나왔다. 여름이었는데도 손끝이 시릿해질 정도의 냉기였고, 그 냉기 속에는 습기와는 다른 종류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기운이 섞여 있었다. 에어컨도 켜지 않은 방이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 냉기는 분명히 균열 안쪽에서, 그 좁은 틈 하나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손을 균열 가까이 가져갈수록 냉기는 더 짙어졌고, 그 냉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그 순간 뉴스에서 본 게이트 관련 화면을 떠올렸다. 균열, 어둠, 알 수 없는 기운. 그 단어들이 조합되면 딱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걸 모를 만큼 무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파트 벽 안에 게이트가 생긴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게이트는 정부가 지정한 특정 좌표에서만 발생하고, 발생 즉시 탐지망에 걸려 통제 구역으로 지정된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 게이트가 서울 변두리 낡은 아파트 안방 벽에서, 아무런 경보도 없이 조용히 생겨날 수 있다는 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상식과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 어긋남이 오히려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몸이 오랜만에 긴장하며 팽팽해지는 걸 느꼈다. 지난 일 년 동안 이렇게 몸이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력서를 쓸 때도, 면접장을 나설 때도,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균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는 조명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 손끝이 균열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차가운 시멘트의 감촉 사이로, 균열 안쪽에서 뭔가 희미하게 반짝이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처음엔 조명이 반사된 착시인가 싶었다. 하지만 조명 각도를 바꿔도 그 반짝임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아주 작고,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히 그 어둠 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반짝임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얼굴을 균열 쪽으로 더 가까이 가져갔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