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흰 선만 따라오면 살아요

5화

울리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땅 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고, 벽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저 균열, 안쪽에 뭐가 있는 거 아니야?" 인규가 활시위에 화살을 걸며 물었다.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손은 이미 시위를 반쯤 당긴 채였다. 서하가 균열 입구에 손을 대고 잠시 감각을 확인했다. "마나 반응은 약해. 뭔가 있긴 한데, 강한 놈은 아닌 것 같아." "약한 놈이 저렇게 크게 울려?" "울음소리랑 강함이 항상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서하의 대답에 나는 흰 선을 다시 확인했다. 균열 안쪽으로 이어지는 그 선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위험을 알리는 붉은 기운도 섞여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선을 몇 번이나 눈으로 훑었다. 틀릴 리 없었다. "이 길은 확실히 안전합니다." "확실히, 라니. 아까까진 확실친 않다고 했잖아." 서하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 "이번엔 진짜 확실해요." "근거는?" "…그냥 색이 달라요." 말이 이상했다. 나도 알았다. 하지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눈앞의 흰 선이 다른 것보다 더 진하고 곧게 뻗어 있다는 걸, 색이 다르다는 말 말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서하는 내 '감'이라는 게 그냥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을 조금씩 쌓고 있는 것 같았다. 짐승의 꼬리 공격을 미리 피하게 한 것도, 붉은 선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도, 매번 맞아떨어졌으니까. 나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왜 이런 게 나한테 생겼는지, 언제부터 보이기 시작한 건지,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일행은 좁은 균열 속으로 몸을 하나씩 밀어 넣었다. 하준이 먼저 들어갔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하늘, 인규, 강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하가 들어왔다. 순서는 항상 비슷했다. 위험이 예상되지 않을 때는 하준이 앞장서고, 뒤가 불안할 때는 서하가 맨 끝에 섰다. 그 정도의 규칙은 나도 이제 눈치로 알고 있었다. 균열 안쪽은 예상보다 넓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 같은 공간이었고, 벽면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광물질이 박혀 있었다. 그 빛 덕분에 손전등 없이도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됐다. 하준은 그 빛을 보고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이거 진짜 예쁘다…" "감탄은 나중에. 일단 저 소리 주인부터 확인해야지." 인규가 짧게 잘랐다. 하준은 입을 삐죽였지만 곧 다시 앞을 살폈다. 그리고 그 공간 한가운데, 소리의 근원이 있었다. 작은 짐승이었다. 몸집은 개 정도였지만, 등에 자잘한 뿔이 돋아 있고 몸 전체가 회색빛 돌 같은 질감으로 덮여 있었다. 다리 한쪽이 잔해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였다. 가까이서 보니 그 돌 같은 피부에도 미세하게 결이 나 있었다.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딱딱해 보이는 표면이었다. "…얘가 그 울음소리 주인이야?" 하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몸집은 작은데 목청은 우주 최강이네." 강우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아무도 웃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조금 풀어졌다. 짐승은 사람들을 보자 잔뜩 웅크리며 낮게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도망갈 수 없는 상태였다. 다리를 짓누른 잔해는 짐승의 몸통보다도 커 보였다. "공격성은 낮아 보이는데. 다치기도 했고." 서하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다가갔다. 인규는 여전히 활시위를 놓지 않았다. 나는 그 자세가 신기했다. 위험이 없다고 판단해도, 위험이 없다고 확신할 때까지는 절대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굳이 건드릴 필요 없잖아. 그냥 지나가자." 인규가 말했다. 실용적인 판단이었다. 시간도 아깝고, 굳이 다친 몬스터를 상대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지나가면 저놈이 계속 울 텐데. 그 소리가 다른 몬스터 끌어들일 수도 있어." 서하의 말에 다들 잠깐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강우가 다가가 잔해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바위였는데도 강우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한 번에 치워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준이 또 눈을 반짝였다. "강우 형은 진짜 힘 세다…" "이 정도야 뭐."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짐승의 다리가 풀려나자, 짐승은 절뚝거리며 동굴 안쪽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 짐승은 딱 한 번 우리 쪽을 돌아봤다. 그 눈에 뭐가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망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짧은 소동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다들 조금씩 숨을 돌릴 여유를 되찾았다. 하준도 처음으로 손전등 불빛에 비친 짐승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신기하다… 저거 게임에서 본 몬스터 같아요." "현실은 게임보다 훨씬 위험해." 인규가 무심히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아까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들, 겉으로는 다들 냉정한 척하지만 속은 그렇게 딱딱하지 않다는 걸 요즘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하준아, 게임 많이 했어?" 내가 묻자 하준이 씩 웃었다. "어릴 때는요. 근데 이젠 현실이 더 게임 같아요. 몬스터 나오고, 스킬 쓰고." "현실이 더 게임 같다는 게, 좋은 뜻은 아니지." 하늘이 옆에서 툭 던졌다. 하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동굴을 통과하자, 다시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통로는 아까보다 더 좁아서, 다들 몸을 옆으로 틀어야 겨우 지나갈 수 있었다. 벽을 짚은 손끝에 축축한 습기가 느껴졌다. 공기도 아까보다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끝에, 예상 밖의 풍경이 나타났다. 넓은 공터였다. 원래 지하철 환승 통로로 쓰였을 법한,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이었다. 부서진 안내판이 벽에 반쯤 박혀 있었고, 녹슨 철제 구조물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넓게 펼쳐진 붉은 선이 있었다. "…이거, 뭔가 크게 있다는 뜻인데." 서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헌터의 감각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붉은 선의 규모를 보고 순간 숨이 막혔다. 지금까지 봐온 어떤 선보다도 짙고, 넓었다. 공터 저편,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천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 마주한 짐승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였다.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건 뭐야." 하늘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하는 검을 다시 뽑았다. 강우도 방패 없이 맨몸으로 앞에 섰다. 인규는 화살을 뽑아 시위를 당겼다. 셋의 동작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 이미 몸에 익은 순서인 듯했다. "도윤씨, 하준이 데리고 뒤로 빠져요." 서하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거기'나 '당신'으로 불리던 것과는 다른 무게였다. 나는 순간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이렇게 낯설고, 동시에 조금 안심되는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하준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눈은 계속 앞쪽을 향해 있었다. 손안에서 하준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붉은 선은 공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아주 가늘게, 흰 선 하나가 저 거대한 형체를 지나 반대편 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좁고, 위험하고, 지금까지 본 어떤 흰 선보다 얇은 선이었다. 나는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며 그 선을 다시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닌지, 다른 길이 더 있는 건 아닌지 살폈다. 하지만 그 흰 선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흰 선은, 하필이면 저 거대한 형체의 발밑을 정확히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걸 어떻게 서하에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선을 짚어주기만 하면 됐는데, 이번엔 그 선이 하필 가장 위험한 자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알려줘야 하나, 아니면 다른 길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저기…" 내가 입을 열었다. 서하가 검을 든 채 뒤돌아봤다. "뭐?" 목소리가 짧았다. 지금은 긴 설명을 들을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살 수 있는 길이, 저 안쪽으로 나 있어요. 그런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거대한 형체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짐승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서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데, 뭐." 나는 붉은 선과 흰 선이 겹쳐지는 그 지점을 다시 확인했다. 흰 선은 분명 살아남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이, 지금 저 짐승이 서 있는 자리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결과는 같았다. 이 길을 벗어나면, 다른 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길이, 저놈을 정면으로 지나가야 하는 길이에요." 내 말이 끝나자 공터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인규의 화살이 시위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강우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서하는 아무 말 없이 검을 고쳐 잡았다. 짐승의 붉은 눈이 서서히, 이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을 뗄 때마다 바닥이 쿵, 쿵 울렸다. 그 진동이 발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하준의 손을 더 세게 붙잡았다. 하준도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손끝의 힘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형체가 완전히 몸을 돌려 우리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 그 크기가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지금까지 마주한 어떤 몬스터와도 비교가 안 됐다.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저 짐승의 발밑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 박혔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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