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흰 선만 따라오면 살아요

1화

내 이름은 한도윤. 서울교통공사 소속 야간 안내원이었다. 직업란에 적히는 이름은 '안내인'. 세상 사람들은 이걸 약職이라고 불렀다. 게이트가 열리고 세상에 능력자가 쏟아진 이후, 직업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전투職, 생산職, 그리고 나머지 전부를 뭉쳐놓은 약職. 안내인은 그 약職 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축에 속했다. 길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었다. 취업 설명회에서 어떤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안내인은 능력자 등급으로 치면 F급도 못 되는, 그냥 직업일 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딱히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도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내 눈에는 선이 보였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희미한 흰 선과, 어딘가로 뻗어가다 뚝 끊기는 붉은 선. 흰 선을 따라가면 살았다. 붉은 선을 따라가면 죽었다. 그게 다였다. 이유도, 원리도 몰랐다. 그냥 보였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처음 봤다. 이어달리기 트랙 위에, 다른 애들 눈에는 안 보이는 흰 선이 곡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선을 따라 달렸을 뿐인데 1등을 했다. 담임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너 육상 시켜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선을 따라 달린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 이후로 선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등굣길 골목에 붉은 선이 깔려 있으면 다른 길로 돌아갔다. 나중에 그 골목에서 개가 풀려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저수지에 놀러 갔을 때, 친구 하나가 붉은 선을 밟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걸 팔을 붙잡아 멈춘 적도 있었다. 그날 그 친구는 발밑이 갑자기 푹 꺾이는 급경사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며 나한테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때마다 "그냥 느낌이었어"라고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느낌이긴 했으니까. 다만 그 느낌의 이름이 뭔지 나조차 몰랐다. 나는 이걸 능력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시력이 좋은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겼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재능의 시작이, 하필이면 본인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서울역 지하 3층, 폐쇄된 구舊역사 구역. 내가 야간마다 순찰을 도는 구간이었다. 게이트 사태 이후 지하철 노선 일부는 던전화 위험 지역으로 분류돼 통제선이 쳐졌고, 그 관리 업무가 하필 안내인들 몫으로 떨어졌다. 회사는 이걸 '안내인 업무의 확장'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냥 야근이라고 불렀다. 위험수당은 있었지만 크지 않았다. 한 달에 십만 원 조금 더.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편의점 도시락 몇 번 사 먹는 게 다였다. 그날 밤도 다르지 않았다. 손전등 하나, 무전기 하나, 클립보드에 끼워진 구역 안전 점검표. 그걸 들고 걷는 게 내 밤의 전부였다. 통로는 조용했다. 형광등 몇 개가 깜빡였고, 먼지 쌓인 이정표가 옛 노선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벽에 붙은 옛 광고판은 색이 다 바래서 뭘 팔던 광고였는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점검표에 체크를 하며 중얼거렸다. "구간 1, 이상 없음. 구간 2, 이상 없음." 혼잣말이 습관이 됐다. 이 밑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밤은, 조용하지 않게 끝났다. 발밑에서 진동이 왔다. 처음엔 지나가는 열차의 여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역엔 이제 열차가 다니지 않았다. 사년 전부터 다니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발바닥에 신경을 집중했다. 두 번째 진동이 왔을 때, 나는 이미 벽에 손을 짚고 있었다. 손끝에 닿은 콘크리트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 번째 진동에서, 천장 타일 하나가 떨어져 내 발치에서 깨졌다. 파편이 신발코에 튀었다. "뭐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색이 나타났다. 바닥 전체를 뒤덮는 붉은 선이었다. 폭 하나 없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뻗어나가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붉은 그물이었다. 지금까지 봐온 붉은 선은 항상 하나였다. 골목 하나, 저수지 한 구간, 계단 하나. 이번엔 달랐다. 통로 전체가, 승강장 전체가 붉게 뒤덮여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이런 붉은 선은 처음이었다. "뭐야, 이거…"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이 갈라졌다. 정확히는 갈라진 게 아니라 무너졌다. 서울역 지하 3층 밑에, 지도에도 없는 공간이 열리고 있었다. 던전화. 게이트 없이 벌어지는 자연 발생형 던전화 사고.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지금 내 발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겨를도 없었다.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했다. 마치 거대한 것이 아주 천천히 삼켜지는 소리 같았다. 나는 몸을 던졌다. 붉은 선을 피해서. 그게 반사적으로 가능했던 것도, 사실은 재능이었다. 나는 몰랐을 뿐이다. 그냥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고만 생각했다. 등 뒤로 무너지는 소리가 계속됐다.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소리, 철근이 뒤틀리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섞이는 흙먼지 냄새. 나는 낡은 승강장 기둥을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검은 구멍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손전등을 아래로 비췄다. 빛이 몇 미터 못 가서 흡수되듯 사라졌다. 나는 무전기를 붙잡고 소리쳤다. "지하 3층 폐쇄구역 붕괴! 인명 확인 필요! 지원 요청!" 대답은 잡음뿐이었다. 다시 눌렀다. 또 잡음. 통신이 끊긴 것이다. 이런 깊은 지하에서, 이런 규모의 붕괴가 일어나면 흔히 그렇다고 교육받았던 기억이 났다. 교육받을 땐 그냥 넘겼던 문장이었는데, 지금은 그 문장이 실감나게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아!"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규정대로라면 즉시 대피, 통제선 밖으로 이탈, 상급자 보고. 안내인 업무 매뉴얼 몇 페이지쯤가 정확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읊을 수 있을 만큼 외우고 있었다. 입사 교육 때 세 번을 필기시험으로 봤으니까. 그런데 발이 먼저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매뉴얼 문장이 떠오르는 동시에, 다리는 이미 구멍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순을 인지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그럴 때가 있다. 머리가 계산을 끝내기 전에 몸이 먼저 결론을 내려버릴 때. 구멍 안쪽을 다시 봤다. 붉은 선은 사방에 그물처럼 깔려 있었지만, 그 사이로 아주 가늘게, 흰 선 하나가 뻗어 있었다. 좁고, 위험하고, 거의 안 보일 정도로 가늘었지만 분명히 있었다. 안내인의 눈에만 보이는 길. 나는 그 선을 따라 몸을 낮췄다. 무너진 잔해 사이로, 손전등 빛에 부서진 타일과 뒤틀린 철근이 스쳐 지나갔다. 발밑이 계속 흔들렸다. 한 걸음마다 흰 선의 폭이 신발 한 짝만큼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붉은 선을 밟게 될 거였다. 그 다음이 뭔지는 몰랐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대답해봐요!" 목소리를 최대한 침착하게 냈다. 사실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아이한테 그걸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흐엥… 아저씨…?" 목소리는 가까웠다. 잔해 틈으로 손전등을 비추자, 흙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겁에 질린 눈이었다. 무릎에 피가 조금 맺혀 있었고, 신발은 한쪽만 신고 있었다. 이름은 박하준. 그 이름을 알게 된 건 조금 뒤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눈앞의 아이였다. "괜찮아, 괜찮아. 아저씨가 왔어. 다친 데 있어?" "무릎이… 아파요…" "조금만 참아. 지금 여기서 나갈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갈 방법이 확실하지는 않았다. 흰 선은 아이가 앉아 있는 곳까지만 이어져 있었고, 그다음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주위를 다시 살폈다. 붉은 그물이 사방에서 조금씩 좁혀오는 느낌이었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리고 그 뒤편, 좀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훨씬 낮고, 훨씬 차분한, 훨씬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거기, 움직이지 마." 나는 손전등을 그쪽으로 돌렸다. 빛이 닿는 자리에,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자세, 그 서 있는 방식만으로도 뭔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너진 잔해 위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마치 이 붕괴가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그 순간 처음으로, 윤서하라는 이름을 눈이 아니라 목소리로 먼저 알게 됐다. 아직 그 이름은 몰랐다. 다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이 지하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만은, 나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품 안의 아이가 내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아이를 조금 더 끌어안으며, 어둠 속 그 형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발밑의 흰 선이, 그 순간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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