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흰 선만 따라오면 살아요

2화

손전등 불빛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하준을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겼다. 발소리가 이상했다. 무너진 잔해를 밟는 소리인데도 흔들림이 없었다. 걸음마다 힘이 실려 있었다. 등에는 장검 한 자루, 허리에는 카드형 스크롤 여러 장이 매달려 있었고, 어깨 쪽 방어구는 방금까지 뭔가와 싸운 흔적인 듯 길게 갈라져 있었다. 여자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이상하게 압도적이었다. 나는 순간 숨을 죽였다. 이름은 윤서하.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S급에 가까운 실력을 지닌 유명 던전 헌터였다. 헌터 순위 사이트에 검색하면 상위권에 이름이 뜨는, 방송에도 몇 번 나온 인물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때의 나는 그런 걸 전혀 몰랐다. 내 일상엔 헌터 랭킹 같은 게 낄 자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냥 지하철 안내인이었다. 승강장 붕괴 사고나 처리하고, 취객 상대하고, 가끔 미아 찾아주는 게 내 하루였다. 서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선에는 경계와 의심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 눈빛이 날카로워서 나는 잠깐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품 안의 하준을 생각하면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당신, 여기서 뭐 해?" "역무원입니다. 순찰 중이었는데 갑자기 무너져서…" "역무원이 왜 여기까지 뛰어들어?" 말은 짧고, 날카로웠다. 나는 순간 말이 막혔다. 그러게. 나는 왜 뛰어들었을까. 규정상으론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서울역 안전관리 매뉴얼 어디에도 '붕괴 지점으로 직접 진입하라'는 조항은 없었다. 있다면 오히려 반대였다. 즉시 대피, 즉시 신고, 절대 단독 진입 금지. 나는 그 세 가지를 다 어겼다. "애 울음소리가 들려서요." 서하의 시선이 하준에게 향했다. 그 순간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주 조금. 사람이 매몰차기만 한 건 아니라는 증거였다. "우리 파티가 던전 안쪽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하던 중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통로가 붕괴됐고, 그 여파로 상층부까지 무너진 것 같아. 저 애는 아마 위층에서 떨어진 거고." 나는 그제야 상황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시설 노후화 사고가 아니었다. 몬스터. 던전. 헌터. 내가 평생 뉴스에서만 보던 단어들이 지금 내 눈앞에서 실체를 가지고 서 있었다. 서하 뒤로 세 사람이 더 걸어 나왔다. 한 명은 방패를 든 거구의 남자, 한 명은 지팡이를 쥔 마법사 차림의 여자, 마지막은 활을 멘 젊은 남자였다. 넷이 한 무리로 움직이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듯, 서로 간격을 두는 방식조차 훈련된 것처럼 보였다. 헌터 파티였다. 정식 등록된, 던전 공략을 위해 지하로 들어왔던 팀. 서울역 지하 폐쇄구역이 원래도 던전화 위험군으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순간 처음 알았다. 8년을 이 역에서 일했는데, 그런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회사는 대체 뭘 숨기고 있었던 걸까. "저는 그냥 안내원입니다. 여기 통제구역인데, 헌터 팀이 왜 들어와 있었죠?" "정식 계약 하에 사전 조사 나온 거야. 게이트 관리 협회 승인받고. 그쪽이 몰랐다면, 그쪽 회사가 정보 공유를 안 한 거고." 할 말이 없었다. 서하의 말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논리가 정확한 사람이라는 게, 어쩐지 더 무섭게 느껴졌다. 말이 오갔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 다섯 명, 정확히는 나와 하준을 포함해 여섯 명이 지하 깊숙한 곳에 고립됐다는 것. 그리고 그 위로는, 방금 무너진 콘크리트와 철근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손전등 불빛에 비친 잔해 더미는 사람 키의 몇 배는 될 만큼 높았다. 저걸 다 치우려면 중장비가 필요할 텐데, 여기까지 그 중장비를 들일 방법이 있을까 싶었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하는데." 방패를 든 남자가 잔해를 두드려보며 중얼거렸다. 이름은 박강우. 서하 파티의 탱커였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잔해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느낌을 줬다. 하지만 그 손이 두드리는 잔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통신도 안 되고, 마나 신호도 이상하게 잡혀. 던전 특유의 간섭이야." 지팡이를 든 여자가 덧붙였다. 이름은 정하늘. 파티의 마법사였다. 그녀는 손목에 찬 작은 장치를 흔들어봤지만, 화면에는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흘렀다. "길 찾는 거면 내가 해볼게. 감지 스킬 있으니까." 활을 멘 남자, 최인규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활 시위를 당기며 스킬을 발동했다. 화살촉에 옅은 빛이 감돌더니, 몇 초 후 사라졌다. "…아무것도 안 걸려. 이 던전, 스킬 감지 범위가 너무 좁아." 세 사람의 얼굴에 짜증과 불안이 스쳤다. 강우는 잔해를, 하늘은 마력 계기판을, 인규는 활을 각각 만지작거렸다. 셋 다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눈앞을 살폈다. 내 눈에만 보이는 그 이상한 선들. 흰 선과 붉은 선. 언제부터 보였는지도 모르겠고, 왜 보이는지도 모르겠는 그 선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두운 통로 바닥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흰 선은 옆으로, 붉은 선은 정면으로. 그때 내가 입을 열었다. "저쪽 방향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서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나는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흰 선이 보인다고, 붉은 선이 보인다고 말하면 누가 믿어줄까. 헌터도 아니고, 능력 각성도 안 한 안내인이 그런 말을 하면, 그냥 무시당할 게 뻔했다. 아니, 무시당하는 걸 넘어서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안내인 취급을 받으면, 내 목소리는 앞으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그냥… 감이 그래요." "감이라니." 서하가 반쯤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지만, 신뢰의 웃음도 아니었다. 딱 그 중간, 어른이 아이의 투정을 들어줄 때 짓는 그런 웃음이었다. "우리는 이쪽으로 갈 거야. 저쪽 통로가 더 넓고, 붕괴 잔해도 적어." 서하가 가리킨 방향은, 내 눈에 붉은 선이 가장 짙게 깔린 쪽이었다. 색이 짙어질수록 위험도가 높다는 걸, 나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처음 이 능력이 생겼을 때 반신반의하며 시험해봤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붉은 선을 무시하고 걸어갔던 날, 나는 하마터면 발밑이 꺼지는 구간에 발을 디딜 뻔했었다. 이번엔 그 대상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저 셋이었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가시면 안 됩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확신은 못 드리지만… 위험합니다. 진짜로." 목소리가 떨렸다. 하준이 내 품 안에서 작게 뒤척였다. 아이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이 아이 하나를 지켜내는 것도 벅찬데, 지금은 낯선 어른들의 목숨까지 신경 쓰고 있는 내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서하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여전히 의심이 있었지만, 아주 작은 틈도 함께 있었다. 헌터로 오래 살아온 사람은, 확신 없는 경고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서하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그 틈은 오래가지 않았다. "강우, 하늘, 먼저 가서 확인해봐." 서하의 지시에 강우가 방패를 앞세우고 걸어 들어갔다. 하늘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서하가 가리킨 그 방향, 붉은 선이 가장 짙은 그 방향으로. 내 눈앞에서, 두 사람의 발밑에 깔린 붉은 선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핏줄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붉은 색이 통로 안쪽으로 갈수록 진해졌다. 처음 보는 농도였다. 이렇게 진한 붉은 선은 나도 본 적이 없었다. "멈춰요! 진짜로!"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강우와 하늘의 등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통로 안쪽에서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콘크리트가 쪼개지는 듯한 굉음,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정하늘의 짧은 비명. 그리고 뒤이어, 뭔가 거대한 것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하준을 안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서하와 인규의 표정도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의 여유는 흔적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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