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흰 선만 따라오면 살아요

3화

으르렁거리는 소리의 주인은 곧 모습을 드러냈다. 몸통 길이만 3미터가 넘는, 등에 뿔이 돋은 짐승형 몬스터였다. 눈은 붉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진동했다. 던전 도감에는 '지각파쇄자'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중급 몬스터라고 했다. 지하 던전에서 흔히 나오는 종류였지만, 서울역처럼 미완성 상태로 던전화된 공간에서는 원래 등급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걸, 강우도 하늘도 이 순간에야 깨달았다. 나는 그런 걸 알 리도 없었지만, 저 눈빛만 보고도 알았다. 이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강우, 방패!" 서하의 외침에 강우가 방패를 세웠다. 짐승의 앞발이 방패를 후려쳤고, 강우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콘크리트 잔해에 부딪히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좁은 공간이라 소리가 갈 데 없이 사방으로 부딪혔다. 하늘이 즉시 방어 마법을 펼쳤다. 푸른 빛의 결계가 강우와 그 주변을 감쌌다. 짐승의 두 번째 공격이 그 결계에 튕겨 나갔다. 결계에 부딪힌 순간 파직, 하는 소리가 났고 하늘의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서하가 검을 뽑아 들고 뛰어들었다. 몸놀림이 가벼웠다. 십 년 넘게 이 일을 해온 사람의 움직임이란 게 저런 걸까, 생각했다. 인규가 뒤에서 화살을 쏘아 짐승의 다리를 노렸다. 화살은 정확히 관절 사이를 파고들었다. 전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고, 나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투불능인 안내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검도 못 쓰고, 마법도 못 쓰고, 그저 붉은 선이 어디로 흐르는지 보는 것뿐.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고, 지금 이 순간엔 그마저도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붉은 선이, 지금 하준이 서 있는 방향으로 스멀스멀 뻗어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계산할 시간은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하준아!" 내가 하준을 뒤에서 끌어안듯 낚아채 옆으로 굴렀다. 그 순간 짐승의 꼬리가 방금 하준이 서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다. 먼지가 얼굴을 덮쳤고, 귀가 멍했다. 팔뚝에 무언가 긁힌 감각이 뒤늦게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떨리는 하준을 품에 안은 채 중얼거렸다. 사실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몬스터, 처음 느끼는 위협. 흰 선과 붉은 선만 보던 세계에, 실체가 있는 죽음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그동안 나는 죽음을 그저 색깔로만 봤다. 붉은 선이 하나 사라지면 그게 죽음이라고, 딱 그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짐승의 꼬리가 만들어낸 바람이 뺨에 스쳤고, 그 순간의 온도까지 기억에 남았다. 죽음은 색깔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하준은 내 품 안에서 딸꾹질하듯 울음을 삼켰다. 작은 몸이 계속 떨렸다. 나는 그 등을 가만히 두드려줄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십 분쯤 이어졌다. 서하가 결정타를 먹인 후에야 짐승은 바닥에 쓰러졌다. 검은 안개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 안개가 흩어지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방금까지 그렇게 포효하던 짐승이 마지막엔 소리 하나 없이 사라졌다. 헌터들이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강우의 어깨는 더 심하게 갈라져 있었고, 하늘은 마력을 거의 다 소진한 얼굴이었다. 인규는 화살통을 확인하며 남은 화살 개수를 세고 있었다. 셌다가, 다시 세고, 또 세는 걸 보니 생각보다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서하가 나 쪽으로 걸어왔다. 그 표정에는 방금까지의 의심 대신, 다른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방금 애 구한 거, 어떻게 알았어?" 나는 대답을 미뤘다. 그러자 서하가 다시 물었다. "타이밍이 이상했어. 짐승 꼬리가 어디로 갈지 미리 알고 움직인 것처럼." "…그냥 감이라니까요." "두 번째 감이네." 서하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만 그 뒤로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의심 위에 뭔가 다른 게 덧씌워졌다. 궁금함이라고 해야 할지, 경계라고 해야 할지, 아직 나도 정확히는 몰랐다. ───── 헌터들이 짐승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하준의 사연을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하준은 엄마와 함께 서울역 지하상가에 왔다고 했다. 엄마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통제선을 넘어 구역 안으로 잘못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통제선 표지판이 낡아서 잘 안 보였다고, 하준은 울먹이며 설명했다. 여덟 살, 많아봐야 아홉 살. 손에는 아직 붕어빵 봉투를 꼭 쥐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붕어빵은 진작 다 뭉개진 뒤였지만, 하준은 그걸 놓지 않았다. "엄마가 나 찾고 있을 거예요…" "찾을 거야. 우리가 먼저 밖으로 나가면 돼."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저 아이를 안심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먼저였다. 어른이 되면 이런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잠깐 그런 생각도 했다. 헌터들의 사연도 짐승을 상대하는 틈틈이 조각조각 흘러나왔다. 서하는 십 년 넘게 헌터로 살아온 베테랑이었다. 초창기 게이트 사태 당시 가족을 잃고 헌터가 됐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서하 본인은 그 이야기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눈빛만 보면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보다 굳은 얼굴이 더 익숙해 보였다. 강우는 서하와 오 년째 파티를 맞춰온 탱커였다. 몸이 크고 말이 적었다. 방패를 든 채 앞에 서 있는 걸 제일 편해하는 사람 같았다. 다치고도 신음 한 번 내고는 다시 자세를 잡는 걸 보면, 이 일이 그에게는 그냥 일상인 듯했다. 하늘은 대학 졸업 후 바로 헌터 길드에 들어온 신진 마법사였다. 다른 셋에 비해 표정이 자주 바뀌었다. 무섭다는 티도, 긴장했다는 티도 다 얼굴에 드러났다. 그게 오히려 사람 냄새 나게 느껴졌다. 인규는 이 파티에서 가장 막내였다. 화살통을 세고 또 세던 그 손끝에서, 이 던전이 예상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걸 제일 먼저 눈치챈 사람이 바로 인규였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사연은 각자의 몫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과거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파티는 결과로 뭉치는 조직이지, 사연으로 뭉치는 조직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내 사연은, 아무도 몰랐다. 안내인이 된 이유. 흰 선과 붉은 선을 처음 본 순간.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살아온 시간들. 나는 그 모든 걸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재능은, 때로는 본인조차 재능이라 부르지 못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이 눈으로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게 재능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이상한 병 같은 거라고, 남한테 말하면 안 되는 비밀 같은 거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인규가 물었다. 서하가 잔해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위로 올라갈 길이 없으면, 아래로 내려가서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해. 지하철 구舊역사 도면상, 3층 밑에 또 다른 통로가 있어." "거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모르지. 던전화된 구간이면 도면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하늘이 손목에 찬 장비를 확인하며 덧붙였다. "마력도 얼마 안 남았어요. 큰 거 한 번 더 오면 저는 별 도움 못 돼요." 강우가 어깨를 만지며 픽 웃었다. "방패는 살아있으니까 걱정 마." "그 방패가 다 갈라졌잖아요." "갈라진 거지 부서진 건 아니잖아." 누구 하나 웃을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그 말에 인규가 픽 웃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사람은 이상하게 이런 순간에도 웃는다. 지하 깊은 곳, 방금 몬스터와 사투를 벌인 자리에서도. 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내 눈앞에 펼쳐진 흰 선을 다시 봤다. 가늘고 위태롭지만, 확실히 아래로,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흰 선은 언제나 정직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선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끝에 뭐가 있는지는 나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저쪽 길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서하가 나를 바라봤다. 이번엔 의심보다 다른 게 먼저였다. "또 감이야?" "네." "…믿어보지. 대신 틀리면 책임져." "제가 뭘로 책임을 지죠." "몰라. 뭐라도." 서하가 픽 웃었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지하 깊은 곳, 방금 몬스터와 사투를 벌인 자리에서, 잠깐 웃음이 오갔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하준도 그 분위기를 느꼈는지, 내 옷깃을 잡은 손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그 안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산소 농도 측정기를 확인하던 하늘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거, 산소가 조금씩 줄고 있어." 그 한마디에 방금까지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우도, 인규도, 서하도 동시에 하늘 쪽을 돌아봤다. 나는 하준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흰 선은 여전히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선의 끝에 산소가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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