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 며칠간, 촬영은 이상하게 평화로웠다.
오전엔 기초 체력 훈련, 오후엔 장비 정비, 저녁엔 다음 던전 브리핑. 리얼리티 쇼치고는 지나치게 일상적인 스케줄이었다. 카메라는 여전히 우리를 따라다녔지만, 예전처럼 사사건건 자극적인 장면을 뽑아내려는 기색은 줄었다. 나는 이 평화가 오히려 낯설었다. 마치 폭풍 전에 일부러 조성된 정적처럼, 지나치게 조용한 게 더 불안했다.
백은서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검술 훈련을 했다. 새벽 여섯 시, 훈련장 한쪽에서 그녀가 검을 뽑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나는 그 옆에서 물자를 정리하거나 지도를 살폈다. 굳이 같이 있으라는 지시는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매번 그렇게 됐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사흘째부터는 그냥 습관이 됐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 눈, 항상 켜져 있는 건가요."
하루는 백은서가 검을 정비하며 물었다. 숫돌에 검신을 갈아내는 소리가 사각사각,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제 마음대로 안 되는데요."
"조건이 있나요."
"위기 상황일 때만 보이는 것 같긴 한데, 확신은 없어요."
"실험해보죠."
"네?"
되묻는 순간 그녀는 이미 검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나는 아직 대답도 안 했는데.
그날부터 백은서는 훈련 중 나에게 이런저런 걸 시켰다. 검을 휘두를 때 어디가 이상한지 봐달라, 자세를 확인해달라, 무기의 균형점을 짚어달라. 처음엔 그냥 이 인간이 나를 이용하나 싶었는데, 며칠 지나고 보니 이게 꽤 잘 맞았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 상태창을 옆에서 실시간으로 읽어주는 느낌이었다. 다만 상대는 진짜로 죽을 수도 있는 실전이라는 게 게임과 다른 점이었다.
"여기, 손목 각도가 살짝 꺾이는 순간에 선이 흐려져요."
"흐려진다는 게 무슨 뜻이죠."
"끊기진 않는데, 얇아져요. 마치 스킬 연산이 살짝 미끄러지는 것처럼."
"거기가 제 검술에서 항상 문제였던 지점입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담담한 고백이 왜 이렇게 무겁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삼 년 훈련한 사람이 자기 검술의 결점을 남한테 그렇게 태연하게 인정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걸 아셨어요?"
"느꼈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그거 모른 채로 계속 싸우신 거예요?"
"싸울 땐 알 겨를이 없으니까요."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서글픈 대답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훈련 방식이 조금 바뀌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면 내가 그 선을 봐주고, 흐려지는 지점에서 그녀가 자세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한 번, 두 번, 열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할 때마다 선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성공률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나는 그게 신기해서 몇 번이나 혼자 속으로 되뇌었다. 되네. 진짜로 되네.
둘째 주 던전 테스트에서, 우리 페어는 처음으로 최상위권 성적을 냈다. 결과 화면에 우리 이름이 상단에 뜨는 걸 보고 나는 잠깐 내 눈을 의심했다. 백은서도 평소보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는데, 본인은 절대 인정 안 할 표정이었다.
방청석의 반응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조롱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묘한 시너지'라는 표현이 슬쩍 섞이기 시작했다. 인터넷 반응도 비슷했다. 처음엔 밈으로 조롱당하던 우리 조합이, 이제는 '저 둘 뭐지'로 바뀌었다는 걸 스태프가 지나가듯 알려줬다.
도하나는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 화려하게 웃었지만, 쉬는 시간이면 나에게 다가와 진심으로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그 눈 어떻게 쓰는 거예요?"
"저도 몰라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진짜로 몰라요. 그냥 어느 순간 보여요."
"신비주의 콘셉트인가."
"콘셉트면 제가 이렇게 답답하겠어요?"
도하나는 그 말에 크게 웃더니 손을 흔들며 다시 카메라 쪽으로 돌아갔다. 저 텐션은 정말 어디서 나오는 건지 늘 궁금했다.
윤소야는 지팡이 안전장치가 풀려 있는 걸 내가 지적해준 뒤로 나를 조금 다르게 봤다. 정확히는 눈도 잘 못 마주치던 애가 이제는 가끔 먼저 인사를 했다. 어제는 지나가다 작게 "저기요" 하고 부르길래 돌아봤더니, 정작 할 말은 없고 그냥 고개만 까딱하고 지나갔다. 그것도 나름의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강노아는 여전히 날카롭게 말했다.
"운이 좋았던 거 아니야?"
"운이면 두 번은 안 통하죠."
"두 번 다 우연이었을 수도 있고."
"세 번째도 지켜봐요."
"세 번째까지 우연이면 그것도 능력이겠네."
"칭찬으로 들을게요."
노아가 피식 웃었다. 완전히 인정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무시하는 웃음은 아니었다. 나는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싱크로율은 여전히 낮았다. 셋째 주까지 측정된 수치는 15퍼센트, 넷째 주엔 17퍼센트. 여전히 최하위권이었지만, 최소한 조롱거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 낮은 숫자 뒤에 뭔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았다. 숫자는 낮은데 결과는 계속 좋으니, 다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디는 그 사이 몇 번 더 우리 앞에 나타났다. 매번 백색 파동에 대해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원인은 여전히 밝히지 않았다.
"진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관찰 중입니다."
"그러니까 뭔지 모른다는 거잖아요."
"모른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게 그 소리 아니에요?"
"의미론적으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가디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빛만 깜빡였다. 인공지능도 곤란할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깜빡임이 꼭 사람이 말 돌리다 눈치 보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그냥 웃고 넘겼다.
그렇게 별일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듯했다. 훈련하고, 정비하고, 소소하게 던전을 클리어하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리얼리티 쇼 생활이었다.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이런 게 평화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주 초, 갑자기 전 출연진이 스튜디오로 소집됐다. 방송 시작 전인데도 이런 식으로 전원을 모으는 건 처음이라 다들 웅성거렸다.
대형 스크린에 예고 방송이 떴다. 화려한 그래픽과 함께 자막이 지나갔다.
'다음 주, 특별 게스트 등장!'
그리고 화면 가득 최강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청석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먼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삼 년 전 그날, 그가 나를 버리고 떠나던 순간의 표정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다. 웃고 있었다. 그때 그 얼굴이. 지금 화면 속 얼굴과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