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기초만 20년, 은둔 고수

5화

집에 도착해서, 나는 일단 밥상을 차렸다. 감자 넣은 된장국에, 계란말이, 김치. 호화로운 상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가 내 최선이었다. 솥에서 밥을 퍼 담으면서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쌀은 얼마 남았고, 된장은 며칠치고, 계란은 몇 알 남았고. 은퇴 뒤 산내리 생활에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이 생활비 계산이다. 마법보다 이게 더 실전적인 스킬이라니, 인생이란 참. 서은하는 상 앞에 앉아서도 숟가락을 들 생각을 안 했다. 그냥 상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안 먹어?" "먹어도 되나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밥상에 밥이 있으면 먹는 거지, 뭘 물어." "그게... 대가는 뭘로 치르면 되나요?" 이번엔 더 이상한 질문이었다. 나는 순간 얘가 얼마나 험한 세상을 굴러다녔는지 실감했다. 밥 한 끼에도 값을 매기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대가는 나중에. 일단 먹어. 식으면 맛없어." 서은하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었다. 한 입, 두 입.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촥촥촥. 숟가락질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계란말이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지도 않고 삼키려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누가복음 15:16,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탕자 이야기가 딱 이럴 때 떠오른다. 먹을 걸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던 애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성경에서는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데, 나는 계란말이 한 접시가 최선이다. 아버지의 위엄이란 게 이런 데서 갈리는구나 싶었다. 먹다가 서은하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소리도 안 내고, 그냥 밥을 먹으면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숟가락은 계속 움직였다. 눈물이 국그릇에 떨어져도 개의치 않고 국을 떠먹었다. 그 모습이 웃기다기보다는, 뭔가 마음 한구석을 긁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걸 보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계란말이를 한 접시 더 밀어줬다.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으면 체해." 다른 위로의 말이 안 떠올랐다. 원래 이런 상황에 서투른 사람이다, 나는. 현역에서 물러난 뒤 사람 만날 일이 줄다 보니, 위로하는 법도 다 까먹어버린 모양이다. 밥을 다 먹은 후, 서은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백로가 사람이었어요." 백로가. 이름은 들어본 적 있다. 명문 마술 가문, 대대로 대단한 마법사들을 배출한 곳. 왕국 마법사 서열에 이름 몇 개는 항상 걸려 있는 그런 집안. 나 같은 은퇴자한테도 소문이 들어올 정도면, 나름 유명한 곳이라는 거다. "마력값 10이었어요. 그래서, 버려졌어요." 마력값 10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나는 현역에서 물러난 처지라 감이 잘 안 왔지만, 이 애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냥 낮은 숫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숫자였다. 숫자 하나로 사람 인생이 결정된다는 게, 참 편리하고도 잔인한 시스템이다. "그게 그렇게 낮은 거야?" "보통 신생아 검사에서 100은 나와야 정상이에요. 저는... 10이었어요. 검사 마법사가 다시 재보자고 세 번이나 다시 했는데, 계속 10이었어요." 세 번. 같은 결과를 세 번 확인받는 심정이 어떤 건지, 나는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이사야 53: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버림받았으며] 딱 저 구절 같은 인생을, 이 어린 나이에 벌써 겪은 거다. "가문에서 나왔는데, 갈 곳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숨어 살려고 했는데..." "몬스터한테 걸렸구나." 서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내리가 조용한 마을이라고 들어서... 여기서라면 아무도 저를 못 찾을 줄 알았어요." 조용한 마을 좋아하네. 삼안멧돼지가 활개치고 다니는데 뭐가 조용해. 나는 그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 마력값 10.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확실히 낮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할 게 있다. "마력값이 10이면, 그게 뭘 못 한다는 뜻이야?" 서은하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야... 큰 마법을 못 쓰죠. 화력도 낮고, 지속력도 없고. 광역 마법은 꿈도 못 꾸고, 방어막도 몇 초면 깨지고..." 말하면서 서은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자기가 못하는 걸 나열하는 게 익숙한 모양이었다. 어디서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자기 부정을 되풀이했을까. "큰 마법을 왜 써야 하는데?" 서은하가 대답을 못 했다. 나는 그 순간, 뭔가 익숙한 걸 느꼈다. 20년 전, 내가 처음 마법 훈련을 시작했을 때 들었던 말이 딱 이거였다. "넌 재능이 없어서 큰 마법은 못 배워." 스승이란 인간이 나한테 그렇게 선언하고, 대충 가르치다가 나가버렸다. 나는 혼자 남아서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큰 걸 못하면 작은 걸 파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큰 마법 대신, 작은 것 두 개만 팠다. 불씨 하나 만드는 마법, 그리고 그걸 아주 정교하게 조절하는 법. 그게 20년이었다. 그리고 지금, 삼안멧돼지의 발톱 하나만 정확하게 태워버린 사람이 여기 있다. 큰 화력 없이도, 정확도 하나로 몬스터를 물리친 게 바로 나다. 이게 재능 없는 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란이었다. [마태복음 13:31,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고 했다. 마력값 10이라는 게, 어쩌면 겨자씨 같은 게 아닐까. 작다고 못 쓰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르게 쓰는 법을 아직 아무도 안 가르쳐준 것뿐일지도. 물론 이건 그냥 내 직감이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현역에서 물러난 놈의 직감이라는 게 얼마나 신뢰도가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나요?" 서은하가 물었다.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갈 곳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는 애가 지금 나한테 자기 운명을 묻고 있었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참고 있던 걸 이제야 터놓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침묵했다. [룻기 1:16,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이 나오미에게 한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구절인데, 지금 상황이 그거랑 좀 비슷한 것 같다. 물론 나는 나오미도 아니고, 이 애 시어머니도 아니지만. "일단 여기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은하 눈이 커졌다. "제가... 여기 있어도 돼요?" "방 하나 남는데. 청소만 좀 하면 되지." 무심하게 말했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집주인이 세입자 들이는 것도 아니고, 뭐 대단한 계약서 쓸 것도 아니고. 그냥 방 하나 내주는 거,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다. 서은하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번엔 소리를 내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이 애가 얼마나 오래 감사받을 일도, 감사할 일도 없이 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나이에 벌써 세상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게,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울지 말고. 밥그릇 눈물로 채우면 짠맛 나." 농담을 던졌는데, 서은하는 울면서도 웃었다. 웃음소리가 어색했다. 아마 웃는 것도 오랜만인 모양이었다. "대신." 나는 조건을 하나 붙였다. "내가 좀 알아. 기초적인 거. 원한다면 가르쳐 줄게." 마력값 10을, 재능 없는 은둔자가 가르친다. 이게 말이 되는 조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도 심심했으니까. 산내리로 내려온 뒤 대화 상대라고는 마을 사람들과 산새들뿐이었으니, 이 정도 변화는 오히려 반가운 축이었다. 서은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제자로 받아주세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까 밥 먹으면서 눈물 흘리던 애가 아니었다. 뭔가 스위치가 켜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스승이 되었다. 스승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제자가 생겨버렸다. 인생이란 진짜 예측이 안 된다. 그날 밤, 나는 마당에 나와 하늘을 봤다. 별이 유독 많았다. 산내리는 원래 별이 잘 보이는 마을이었다. 가로등도 몇 개 없고, 공기도 맑아서. 산내리로 내려온 뒤 이 하늘을 보는 것만큼은 질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별들 사이로, 뭔가 이상하게 붉은 빛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빛이었다. 별처럼 보였지만, 별일 리는 없었다. 별은 저렇게 불규칙하게 깜빡이면서 조금씩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 나는 눈을 몇 번 비볐다. 그럴 리가. 설마 내 눈이 잘못됐나. 다시 봐도 그 붉은 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산내리를 내려다보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산내리로 내려온 뒤 처음 발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 현상이었다. [요엘 2:30, 내가 하늘과 땅에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피 같은 붉은 빛이라니, 이거 그냥 넘길 게 아닌 것 같은데. 성경에 이런 구절이 나올 때는 대부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심판이거나, 재앙이거나, 뭐 그런 거창한 이름이 붙는 사건들. 산내리로 내려온 뒤 이런 징조는 한 번도 못 봤는데, 하필 제자 들인 첫날 밤에 이런 게 뜨다니. 백로가에서, 버려진 딸을 정말로 그냥 놔뒀을까. 명문 가문이라는 곳이, 자기 핏줄을 마력값 하나로 내쳤다고 해서 완전히 손 놓았을 리는 없다. 가문의 이름에 흠이 될 만한 존재를, 어딘가에서 계속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저 붉은 빛이 그거랑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예감이 안 드는 건 확실했다. 방 안에서는 서은하가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고, 오랜만에 지붕 있는 곳에서 자는 밤. 저 애한테는 오늘이 오랜만에 평화로운 밤일 텐데. 산내리의 평화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 붉은 빛을 본 순간 처음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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