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기초만 20년, 은둔 고수

4화

"강씨! 무사한가!" 이장님이 숨을 헐떡이며 산길 위로 올라왔다. 뒤에는 슈퍼 아줌마랑 동네 청년 둘도 따라 올라왔다. 다들 손에 몽둥이나 삽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이장님은 원래 삽질보다 삽질 얘기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인데, 진짜로 삽을 들고 뛰어온 걸 보니 상황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슈퍼 아줌마는 손에 몽둥이라기보다는 파리채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저걸로 뭘 하려고 했는지는 나도 궁금했다. 청년 둘은 아무것도 안 들고 왔으면서 뒤에서 어깨만 넓게 펴고 있었다. 저건 그냥 폼이다. 딱 봐도 폼이다. [사무엘상 17:40, 다윗이 막대기를 손에 들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 다윗은 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잡았지, 이 사람들은 삽으로 뭘 하려고 온 건지 모르겠다. 삼안멧돼지가 삽질 한 방에 나가떨어질 리는 없을 텐데. 뭐, 마음만은 감사하게 받아야겠지. "뭔 소리가 그렇게 나던디!" 슈퍼 아줌마가 소리쳤다. "멧돼지가, 아니 뭔 짐승 소리가 산을 흔들드래!" "나도 자다가 벼락 치는 줄 알았슈." 청년 하나가 거들었다. "근디 벼락은 아닌 거 같고." 산내리는 원래 조용한 동네다. 밤에 개 짖는 소리만 나도 다음날 아침 마을 회관에서 회의가 열리는 그런 동네. 그런데 오늘은 산이 통째로 울렸으니, 다들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온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 여기서 "제가 20년 갈고 닦은 무영창 마법으로 삼안멧돼지를 제압했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마치 편의점 알바가 손님한테 "제가 사실 이 편의점 건물주입니다"라고 말하는 거랑 비슷한 파급력을 가질 거다. 동네가 뒤집힌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진다. 다음날 아침이면 옆 마을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구경한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다. "아, 별거 아니었슈." 나는 최대한 심드렁하게 말했다. "큰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제가 놀래켜서 쫓아냈슈." "멧돼지가 그런 소리를 낸다고?" 청년 하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산이 울릴 정도로?" "요새 산에 뭐 있다잖아유, 변종이니 뭐니. 저도 자세힌 몰르겠슈." 적당히 얼버무리는 게 이럴 때 최고다. [잠언 26: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지만, 지금은 미련한 척하는 게 살길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자기 편한 대로 갖다 쓰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지금은 생존이 신학보다 우선이다. 아멘. 이장님이 팔짱을 끼고 나를 쭉 훑어봤다. 그 눈빛이 어딘가 미심쩍었는데, 다행히 그 미심쩍음은 나한테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왜냐하면 옆에 있는 애가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옆에 있는 애였다. 서은하가, 이 애가. 로브를 걸치고 흙투성이가 된 채로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이 조그만 여자애. 누가 봐도 정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나 혼자 있었으면 "멧돼지 쫓아냈슈"로 대충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얘가 옆에 서 있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이장님이 서은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아그는 누구여?" 슈퍼 아줌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은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서 굴러온 아그여? 옷은 또 왜 저리 이상하고?" 로브 자체가 이 동네에서는 튀는 복장이다. 산내리에서 로브 입고 다니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다. 그리고 나도 평소엔 로브 안 입는다. 오늘은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 "저도 방금 만났슈. 몬스터한테 쫓기고 있어가지고, 제가 도와줬슈." "몬스터한티 쫓기는 걸 니가 어떻게 도와줬대?" 슈퍼 아줌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니는 마력이 없는 사람 아녀?" 아, 이 마을에서 나는 "마력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게 편해서 그렇게 살았던 거고. 20년 갈고 닦은 무영창 마법을 매번 설명하고 다니는 것도 피곤한 일이라, 나는 그냥 이 마을에서 조용히 마력 없는 사람 코스프레를 하며 살아왔다. 효과는 확실했다.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까지는. [요한복음 9:25, 나는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전에는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그것이라] 나는 지금 이 사람들이 안 보는 걸 봐야 하는 상황이다. 동시에 이 사람들이 못 보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성경 구절 갖다가 눈속임에 쓰는 거, 이거 나중에 회개해야 할 목록에 추가다. "고함을 크게 질렀슈. 그게 도움이 됐나 보드래유." 말이 되나 싶었지만, 어쨌든 이장님과 슈퍼 아줌마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대충 넘어가는 눈치였다. 마을 사람들은 원래 별로 깊게 안 파고든다, 이게 산내리의 장점이다. 도시에서는 이런 소리 하면 바로 경찰 부르지, 여기는 "그런가 보다" 하고 만다. 시골 인심이라는 게 이럴 때 참 감사하다. 청년 하나가 그래도 뭔가 미심쩍은지 한마디 던졌다. "근디 그 고함 소리를 짐승이 알아들었대유?" "…알아들었나 보드래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지만, 관자놀이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이 청년, 생각보다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타입이었다. 다음에 이런 상황 생기면 좀 더 그럴듯한 핑계를 준비해둬야겠다. 머릿속에 메모. 서은하가 그 사이, 내 소매를 슬쩍 잡았다. 작은 손이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아직도 떨고 있었던 거다. "저기..." 서은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딱 그 한마디였는데, 왠지 코끝이 찡했다. 농담이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사방에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랑 삽 들고 서 있는데 감동에 빠질 틈이 어디 있나.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넌 어디서 왔어? 부모님은?" 내가 묻자, 서은하 표정이 확 굳었다. 말을 안 하려는 게 아니라, 말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술이 몇 번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지는 걸 보니, 뭔가 말하려다가 삼키는 것 같았다. 어린애 얼굴에 저런 표정이 뜨는 거, 나는 별로 좋게 안 봤다. 이장님이 옆에서 눈치를 챈 듯 슬쩍 끼어들었다. "강씨, 일단 애를 데려가지 그려. 여기 세워놓고 물어봐야 뭐 나오것서." 슈퍼 아줌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애가 놀랬는디 여서 캐물어봐야 입도 안 뗄겨. 밥이나 멕이고 재우고 낼 얘기해." 맞는 말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이럴 때는 또 은근히 상식적이다. 평소엔 남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정작 필요한 순간엔 선을 딱 지킨다. 이게 산내리 사람들의 반전 매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일단 저희 집으로 가자." 서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슬쩍 로브 안쪽, 뭔가를 감추듯 손으로 눌렀다. 그게 뭔지는 나도 몰랐다. 품 안에 뭘 숨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습관적인 동작인지 구분이 안 됐다. 일단 지금 캐물으면 또 입을 닫을 게 뻔하니, 나도 못 본 척했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이장님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강씨, 나중에 자세히 좀 말해줘. 뭐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하고." "예예, 걱정 마셔유." 걱정 말라는 말이 제일 걱정되는 말이라는 걸 이장님은 모르는 것 같았다. 뭐, 나도 지금 당장은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일단 넘기는 수밖에.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옆을 슬쩍 봤다. 서은하는 여전히 로브를 꽉 움켜쥐고 걷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오래 걸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아니면 오래 갇혀 있다가 나온 사람처럼. 산길 옆 개울물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촤르르르륵! 그 소리에 서은하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얘한테는 물소리 하나도 놀랄 거리인 모양이었다. 서은하 손목에, 낙인처럼 새겨진 작은 숫자 문신이 보였다. 10. 뭔지는 몰랐지만, 딱 봐도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문신이라기보다는 낙인 같은 느낌이었다. 살에 새겨진 게 아니라 찍힌 것 같은, 그런 인상. 나는 그동안 별별 이상한 것들을 다 봤지만, 저런 숫자 낙인은 또 처음 보는 거였다. 번호표인가? 순번인가? 아니면 뭔가 더 불길한 의미가 있는 건가? 이게 뭐냐고 물으려는 순간, 서은하가 그 손을 슬쩍 소매 속으로 숨겼다.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이런 시선에 익숙해서 반사적으로 감추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뭔가 더 큰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일단은 밥부터 먹여야겠다. 집 대문이 보이자, 서은하가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안심이 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서은하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안전한가요?"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안전하냐고? 이 동네에 삼안멧돼지가 돌아다니고, 내가 무영창 마법을 쓰는 판국에 안전을 논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안전하지." 말은 그렇게 했는데,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미세하게 눌린 듯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집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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