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포구 생존제국

2화

나는 그 문구를 세 번 다시 읽었다. [경고: 최초 등록 이후에는 등록 위치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확신은 없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명이 들렸고, 나는 시간을 오래 끌 여유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꼈다. '등록 위치를 바꿀 수 없다니.' '그럼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 더 안전하면 어떡하지.' 생각은 거기까지 뻗어갔지만, 나는 이 방을 벗어나 다른 곳을 알아볼 처지가 아니었다. 현관문 밖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창문 아래 골목에는 그 회색 형체가 서 있었다. '전화를 걸어볼까.' 나는 휴대폰을 집어 119를 눌렀다. 신호는 가지 않았다. 112도, 어머니 번호도, 룸메이트였던 친구 번호도 마찬가지였다. 와이파이 아이콘에는 X 표시가 떠 있었다. 데이터 표시줄도 하나 없이 비어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시지 앱을 열어봤다. 전송 버튼을 눌러도 느낌표가 뜨며 실패 표시만 반복됐다. 나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액정이 켜진 채로 잠깐 빛을 뿜다가 저절로 꺼졌다. 나는 다시 눈앞의 창을 바라봤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등록]이라는 버튼처럼 보이는 부분을 손끝으로 눌렀다. 손끝이 화면 같은 것에 닿는 순간 미세한 진동이 손가락 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테리토리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등록 위치: 서울특별시 마포구 노고산동 ○○빌 301호] [적용 스킬: 일상생활(日常生活) Lv.1] 방 안 공기가 아주 잠깐, 미세하게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고, 벽지의 오래된 얼룩 하나가 눈에 보일 만큼 옅어졌다. 나는 벽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그 자리를 만져봤다. 분명 3년 전 곰팡이가 슬어서 생긴 얼룩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벽지 표면이 미묘하게 매끈해진 느낌까지 들었다. '설마 방이 저절로 고쳐지는 건가.' 나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싱크대 위에 며칠째 쌓여 있던 물때가 조금 옅어진 것 같기도 했다. 바닥 장판의 갈라진 틈도 처음보다 좁아 보였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변화였다. 나는 눈앞의 창에 손을 대고 다른 항목이 있는지 찾아봤다. 곧 세 개의 하위 능력이 목록으로 떠올랐다. [환경 유지 - 등록된 공간의 온도, 습도, 청결도를 항상 최적 상태로 유지합니다.] [자동 수복 - 등록된 공간 내 파손된 구조물을 서서히 복구합니다.] [물품 생성 - 일일 자원 한도 내에서 생활용품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각 항목을 손끝으로 하나씩 눌러 세부 설명을 읽어봤다. [환경 유지]는 온도 18도에서 24도, 습도 40퍼센트에서 60퍼센트 사이를 자동으로 맞춘다고 적혀 있었다. [자동 수복]은 하루에 아주 조금씩만 진행된다는 문구가 덧붙어 있었다. 나는 물품 생성이라는 항목을 눌러봤다. 하위 목록에는 물, 즉석밥, 라면, 휴지 같은 익숙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항목 옆에는 숫자가 붙어 있었다. 물 500ml - 자원 5, 즉석밥 1개 - 자원 8, 라면 1개 - 자원 6. 그리고 맨 위에는 [보유 자원: 30/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목록을 더 내려보니 휴지, 물티슈, 비누 같은 것들도 있었는데 자원 소모가 훨씬 적었다. 반면 통조림이나 간편식 종류는 자원이 두 배 가까이 들었다. 나는 그 숫자들을 눈으로 몇 번이나 훑었다. '이건 완전히 생존 계산이잖아.' 나는 일단 물 500ml를 눌렀다. 손바닥 위에 페트병 하나가 툭, 떨어졌다. 라벨도 없는 투명한 병이었지만, 뚜껑을 열자 물 냄새가 났다. 한 모금 마셔봤다. 그냥, 물이었다. [보유 자원: 25/30]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보고 나는 조금 안심했다. '무한이 아니구나.' 하루 30이면, 물 다섯 병에서 여섯 병 정도. 라면이라면 네댓 개. 둘 다 섞어 쓰면 그보다 더 적어질 것이었다. '이 자원이 매일 다시 채워지는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정해진 총량인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하니 물 한 병을 마신 것도 아깝게 느껴졌다. 나는 페트병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놨다. 남은 물을 함부로 마시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정했다. 그러다 문득 냉장고 안에 뭐가 남아 있었는지 떠올랐다. 어제 먹다 남긴 김치와 계란 두 개 정도였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버틸 수 있는 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밖에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창가로 다시 다가갔다. 건물 앞 골목에 그 회색 형체가 서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우리 건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는 젖은 회색빛이었고, 팔이 이상하게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커튼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그 형체가 고개를 천천히 이쪽으로 돌리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 쿵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행히 그것은 다시 고개를 돌려 골목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사람은 아니다.' '저런 게 몇 마리나 더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부엌 서랍에서 식칼을 꺼냈다. 칼자루를 쥔 손이 땀으로 미끄러웠다. 칼날이 형광등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혹시 이 스킬로 저놈을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눈앞의 창을 다시 열어 [일상생활] 항목을 뒤졌다. 공격, 방어, 전투 관련 항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검색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그런 기능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끝으로 창 이곳저곳을 눌러가며 숨겨진 항목이 있는지 뒤졌다. [자동 수복]을 눌러 설명을 자세히 읽었다. '생물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작게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문구를 손끝으로 몇 번이나 짚어봤다. 글자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럼 이 스킬로는 저 괴물을 막을 수가 없다는 거네.' '그냥 방 청소하고 물 만드는 게 전부라는 거잖아.' 허탈함과 동시에 오싹한 기분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런 상황에 청결도를 유지해주는 스킬이라니, 누가 만든 건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식칼을 든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창밖의 비명은 여전히 간간이 들려왔고,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칼을 양손으로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칼자루가 자꾸 미끄러웠다. 그때, 현관문 밖에서 무언가가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쿵. 나는 숨을 멈추고 문 쪽을 돌아봤다. 문고리가 아주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쿵. 두 번째 소리는 더 크고 가까웠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 책상 모서리에 등이 부딪혔다. 식칼을 쥔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문틈 사이로 무언가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사람의 숨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문고리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문고리가 아래로 천천히 꺾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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