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 다음날,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숨어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틀 동안 조금씩 사라지는 물건들, 알 수 없는 발자국, 정체불명의 숨소리. 이 정도면 그냥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내 셸터를 들락날락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일단 알람 센서를 하나 더 사기로 했다.
【현재 보유 포인트: 25】
남은 포인트로는 하나 더 사기가 빠듯했다. 25포인트에서 20포인트를 쓰면 5포인트만 남는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갔다. 그 5포인트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은 안전이 먼저였다.
【교환 가능 항목】
【간이 알람 센서 - 20포인트】
교환을 마치자 5포인트만 남았다.
아니,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알람 센서를 두 개 사는 셸터로 시작하게 해주지. 시스템은 사람 재정 상태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문 반대쪽 벽에도 하나 설치했다. 혹시 다른 경로로 들어올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으니까. 방 구조상 문이 유일한 입구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발자국이 벽 쪽에서 시작된 흔적도 있었던 걸 떠올리면 안심할 수 없었다.
【알림: 알람 센서 2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아까부터 생각해둔 게 있었다. 손전등 옆에, 아까 임무 완료로 받았던 철근 조각을 하나 더 챙겨서 무기 비슷하게 손에 쥐었다.
무기라고 하기엔 좀 초라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손에 쥐어보니 무게감은 그럴싸했다. 휘두르면 최소한 위협은 될 것 같았다. 물론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뭔가 다른 존재라면, 이 철근 조각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대기했다. 배급으로 나온 물과 건빵을 먹으며, 라디오의 잡음을 배경음으로 깔아두고 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건빵은 여전히 딱딱하고 맛도 없었다. 씹을수록 입안이 뻑뻑해졌다. 이럴 때 짜장면 한 그릇만 있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셸터 안에서 짜장면은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전설의 요리 같은 존재였다.
지지직, 지지직.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함과 긴장감이 동시에 쌓였다. 눈은 문에서 떼지 못했지만, 몸은 점점 지쳐갔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졸음을 쫓아내야 했다. 이러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잠들어 버리면 그게 더 웃긴 참사가 될 것 같았다.
【알림: 셸터 유지 시간이 3일 20시간 남았습니다.】
포인트가 부족했다. 이대로 가다간 셸터가 소멸될 수도 있었다. 5포인트로는 그 어떤 것도 살 수 없었다. 최소한의 유지 비용도 안 되는 액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자의 정체를 밝히는 게 더 급했다. 포인트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목숨이 위험한 게 아니라면, 순서는 명확했다.
밤이 깊어졌다.
라디오 잡음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뭔가 다른 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
확실치 않았지만, 분명 사람의 것 같은 숨소리였다. 기계음도 아니고, 몬스터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사람이 숨을 참으려다 못 참고 흘리는, 그런 어설픈 숨소리였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손전등을 꺼두고, 철근 조각을 꽉 움켜쥔 채 문 옆에 몸을 붙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손바닥에 땀이 배어 철근 조각을 쥔 손이 미끌거렸다. 숨을 최대한 죽이고 기다렸다. 목구멍 안쪽이 마른침으로 바짝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삐이익!
알람 센서가 울렸다. 문이 서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끄으윽.
경첩이 낡아서 나는 소리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미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됐다. 작은 발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지금이다.
나는 손전등을 켜고 그쪽을 향해 비췄다.
환한 빛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그 안에 서 있는 건, 정말로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흙투성이 옷, 그리고 겁먹은 듯한 눈빛. 옷 여기저기 찢어진 자국과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얼굴에도 지저분한 흙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이는 대충 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소녀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도망치려는 듯 뒷걸음질을 쳤지만, 좁은 문틀에 걸려 균형을 잃었다.
털썩.
소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어, 어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이미 넘어진 뒤였다. 손가락 끝이 허공만 붙잡았다.
다급하게 다가가려는데, 소녀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몇 번이나 도망 연습을 해온 것처럼, 몸놀림이 재빨랐다.
손에는 뭔가 작은 물건을 꼭 쥐고 있었다. 아마 훔치려던 것이거나, 이미 훔쳐놓은 물건인 듯했다.
"저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알림: 미확인 존재가 안전 구역 내로 진입했습니다.】
【알림: 해당 존재는 인간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인간이라고?
시스템까지 확인해주니 확실해졌다. 이 소녀는 정말로 사람이었다. 안심이 되면서도 새로운 궁금증이 몰려왔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안전 구역은 몬스터의 접근을 차단한다고 했었는데, 인간은 상관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이 소녀도 나처럼 어떤 스킬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혹시 나처럼 어딘가에서 갑자기 이 세계로 떨어진 사람인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일단은 상황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소녀가 다시 도망치려는 기색이 보이면 그대로 놓쳐버릴 게 뻔했으니까.
"천천히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최대한 위협적이지 않게 보이려 애썼다. 철근 조각은 슬쩍 몸 뒤로 숨겼다. 이런 걸 들고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해도 안 믿길 게 뻔했다.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냥... 여기서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소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아까부터 그녀가 꼭 쥐고 있던 손을 슬쩍 풀었다.
그 안에서 떨어진 건, 낯익은 물병이었다.
어제 사라졌던 그 물병.
"아..."
그러니까 이 소녀가, 며칠 동안 내 물자를 조금씩 가져간 그 존재였구나.
발자국, 머리끈, 실 조각, 그리고 물병까지.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그동안 쌓였던 의문들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도둑맞았다는 억울함보다는, 오히려 이 상황이 조금 안심됐다. 최소한 정체불명의 몬스터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안전 구역에는 몬스터가 못 들어온다고 했는데, 이 소녀는 어떻게 자유롭게 드나든 걸까.
혹시 처음부터 이 근처에 있었던 건가. 아니면 다른 경로가 있는 걸까. 셸터 자체에 구멍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도 스쳤다.
질문할 게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지금 당장 물어봐도 대답할 것 같지 않았다.
소녀의 눈빛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고, 몸은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야생 짐승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배고파요?"
일단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소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게 대답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배급 서랍으로 다가가 물병과 건빵을 꺼냈다. 서랍이 열리는 작은 소리에도 소녀가 흠칫 놀랐다.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바닥에 살짝 밀어 놓았다.
"먹어요."
소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눈은 건빵과 나를 번갈아 확인하며, 이게 함정은 아닌지 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와 건빵을 집어 들었다.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얼마나 배가 고팠었는지 알 수 있었다.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키는 듯한 속도였다. 저러다 목에 걸리는 거 아닌가 싶어 물병도 슬쩍 더 가까이 밀어줬다.
먹는 동안에도 경계심을 완전히 놓지는 않은 채, 곁눈질로 나를 계속 살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럴 때 뭔가 멋진 대사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시스템 알림이 하나 떴다.
【알림: 안전 구역 내 2인 이상 존재가 감지되었습니다.】
【알림: 셸터 유지 조건이 변경됩니다.】
뭐?
조건이 변경된다니, 이게 또 무슨 소리야.
【알림: 인원 증가로 인해 일일 유지 포인트가 상승합니다. 신규 조건: 1일당 18포인트】
18포인트?
원래 10포인트도 겨우 맞추고 있었는데, 갑자기 거의 두 배로 뛰었다.
"아니, 이건 좀..."
이게 무슨 세입자 등록도 아니고, 사람 하나 더 있다고 관리비가 이렇게 뛰다니. 이럴 거면 미리 경고라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시스템이란 놈은 언제나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치는 데는 도가 텄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데, 소녀가 건빵을 다 먹고 물병을 마저 비웠다.
그러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처음으로 그녀의 표정에서 경계심이 조금 덜해진 것 같았다. 입가에 묻은 건빵 부스러기를 손등으로 슥 닦아내는 모습이 어쩐지 그 나이대 아이답게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입은 열지 않았다.
"이름이... 뭐예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네? 다시 한번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소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다가가려는 순간, 소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문 쪽을 향해 빠르게 몸을 돌렸다.
"잠깐, 기다려요!"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소녀는 순식간에 문틈으로 빠져나가, 어두운 통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텅 빈 문틈을 바라보며,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알림: 미확인 존재가 안전 구역을 이탈했습니다.】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바닥에 남은 빈 물병과 건빵 포장지가, 이게 현실이었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 소녀는 누구일까. 어디서 왔을까. 왜 나를 계속 경계하면서도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어떻게 이 안전 구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지.
【알림: 셸터 유지 시간이 3일 19시간 남았습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 5】
시간은 줄어들고, 포인트는 부족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까지 등장했다.
상황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다른 감정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소녀가, 왜 그렇게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을까.
마치 사람을 만나는 게 처음인 것처럼, 아니면 사람에게 뭔가 나쁜 경험을 당한 것처럼.
빈 물병을 손에 쥐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 물병을 며칠에 걸쳐 조금씩 훔쳐가던 손. 겁먹은 눈으로도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계속 근처를 맴돌던 발걸음.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그녀가 다시 나타나면, 이번엔 도망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내가 예상한 방식으로 오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한 채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