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던전에서 혼자 살기로 했다

1화

퇴근길이었다. 야근 3주 차, 몸에서 커피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쯤, 땅이 흔들렸다. 처음엔 지하철이 지나가나 했다. 요즘 지하철 공사한다는 얘기를 들었던가. 아니, 그건 옆 동네 얘기였는데. 그런데 발밑이 정말로 갈라졌다. 콰앙!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인지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인지 구분할 틈도 없이, 나는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다. 생각보다 낙하는 느렸다. 마치 슬로우모션 영화 속에 들어간 것처럼, 콘크리트 파편과 흙덩이가 나와 함께 둥둥 떠내려갔다. 가방 속에 있던 텀블러가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아, 저거 오늘 산 건데. 이거 뭔가 익숙한 전개인데. 웹소설 좀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 패턴. 지진, 추락, 그리고— 【알림: 생존 조건이 감지되었습니다.】 왔다. "미쳤다 진짜." 혼자 중얼거렸다. 낙하하면서 혼잣말이라니, 이것도 참 웃긴 상황이었지만 지금 웃을 처지는 아니었다. 귓가에서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고, 코끝에는 흙냄새와 시멘트 가루 냄새가 뒤섞여 들어왔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껄끔거렸다. 철퍽. 뭔가 물컹한 것에 부딪혔다. 다행히 그게 바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통증이 예상보다 덜했다. 등부터 시작해서 온몸으로 충격이 퍼졌는데, 이상하게도 뼈가 부러진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트램펄린에 떨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 【알림: 스킬 '던전셸터'가 각성했습니다.】 뭐? 눈앞이 하얗게 번쩍했다. 마치 스마트폰 화면이 갑자기 밝기 최대로 올라간 것 같은 느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다. 먼지투성이였던 던전 바닥이, 어느샌가 회색 콘크리트로 깔끔하게 정돈된 방으로 변해 있었다. 어? 방금 그거 뭐였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대략 15평쯤 되는 정사각형 공간. 벽은 매끈한 회색이었고, 천장에는 은은한 조명이 자체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닥에는 먼지 한 톨도 없었다. 아까까지 흙과 돌 사이에서 굴러다녔던 나만 유일하게 지저분했다. 에어컨도 없는데 시원했다. 습도도 딱 적당했다. ···이거 뭐야. 호텔인가. 아니, 호텔이면 이렇게 삭막할 리가 없지. 【알림: '던전셸터' 스킬 효과로 반경 5미터의 안전 구역이 생성되었습니다.】 【안전 구역 내에서는 몬스터의 접근이 차단됩니다.】 몬스터? 그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몬스터가 있다는 건 여기가 던전이라는 뜻이고, 던전이라는 건— 그러니까 나는 진짜로 그 흔한 '던전에 떨어진 현대인'이 된 거였다. 와, 미쳤네. 하지만 신기하게도 무섭다는 감정보다 먼저 든 것은 허탈함이었다. 회사에서 시달리다가 지진으로 뒤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세계 던전 입성이라니. 이거 산재 처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부서장한테 뭐라고 보고하지. "죄송한데 저 지금 던전에 있어서 내일 출근 못 할 것 같습니다"라고 메일이라도 보내야 하나. 정신이 붕 뜬 상태로 헛웃음이 나왔다. "저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공에 물어봤다. "누구 없어요?" 대답은 없었다. 벽도 조용했고, 천장도 조용했다. 대신 시스템 알림만 계속 떴다. 【알림: 현재 위치는 '지하 던전 3층'으로 추정됩니다.】 3층이라니. 지하 3층이면 주차장인가, 아니면 정말로 몬스터 나오는 그 3층인가. 추정된다는 말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정확하게 말해주지 왜 추정이야. 【알림: 셸터 유지에는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현재 포인트: 0】 포인트? 또 새로운 개념이었다. 게임을 좀 해봤으니 대충 감은 왔다. RPG 게임의 골드나 마나 같은 거려나. 아니면 통신사 멤버십 포인트 같은 건가. 그거라면 어디 가서 커피라도 바꿔 먹을 텐데. 【포인트는 던전 내 자원을 소모하거나 몬스터를 처치해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아, 몬스터 잡으면 되는 거구나."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포인트가 0이라는 건, 아무것도 교환할 수 없다는 뜻 아닌가.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일단 벽을 만져봤다. 차갑고 매끈했다. 손톱으로 긁어봐도 흠집이 안 났다. 손바닥으로 밀어봐도 미세한 진동조차 없었다. 이거 진짜 튼튼한 재질인가 보다. 【알림: 셸터 벽면은 파괴 불가능한 재질입니다.】 오, 다행이다. 최소한 벽 뚫고 몬스터 들어올 걱정은 없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순간,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뭐지? 돌아보니 방 한쪽 구석에 문이 하나 생겨 있었다. 아까는 없던 문이었다. 회색 벽과 같은 색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였다. 문틀 사이로 미세한 틈이 있었는데, 그 틈에서 서늘한 공기가 새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알림: 셸터 출입구가 생성되었습니다.】 출입구라니, 이거 나가는 문인가, 아니면 뭔가 들어오는 문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에 귀를 대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아봤다. 그냥 평범한 손잡이였다. 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잠금장치는 안쪽에 달려 있었다. 간단한 빗장 형태였다. 이상하게 아날로그한 게, 시스템이니 알림이니 최첨단으로 굴러가는 공간에 왜 이런 구식 빗장이 달려 있나 싶었다. 걸어놓을까. 그런데 밖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걸어두는 게 맞나. 혹시 응급상황에서 빠르게 나가야 할 수도 있잖아. 아니면 반대로, 뭔가가 밖에서 억지로 열려고 할 때 빗장이 버텨줄 수도 있고. 고민 끝에 그냥 열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몬스터가 못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단 지금은, 살았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후, 살았다." 소리 내어 말해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지진에서 살아남았고, 던전에서도 어떻게든 안전지대를 확보했다. 손끝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죽을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짜장면이 먹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짜장면 생각이 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배는 진짜로 고팠다. 낙하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위장이 요란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오늘 점심도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대충 때웠었다. 꾸르륵. 민망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 조용한 방 안에서 이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일인가. 혼자인데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알림: 셸터 내 배급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배급이라니? 갑자기 방 한쪽 벽에서 서랍 같은 것이 스르르 튀어나왔다. 안에는 물병 하나와 압축식 건빵 비슷한 게 들어 있었다. 【현재 보유 포인트가 0이므로 최소 생존 배급만 제공됩니다.】 오, 이거 완전 편의점 시스템인데. 포인트가 있으면 뭐가 더 나오는 걸까. 라면? 삼겹살? 김치찌개? 상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였다. 물병을 뜯어 마셨다. 그냥 물이었다. 미묘하게 차가운 온도까지 딱 적당했다. 건빵도 그냥 건빵이었다. 딱딱하고 퍽퍽했지만, 딱히 특별한 맛은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느껴졌다.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포인트를 벌어야 한다.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무기도 없고 전투 경험도 없다. 그나마 잘하는 거라곤 엑셀 단축키랑 커피 타는 거 정도인데, 이게 던전에서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망했다. 그때, 셸터 벽 어딘가에서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웅. 뭔가 가까이 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건빵을 씹던 입이 그대로 멈췄다.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알림: 몬스터가 안전 구역 경계에 접근했습니다.】 열어둔 문이, 갑자기 너무 크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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