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몬스터라는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시 확인하자면, 나는 지금 무기도 없고 전투 경험도 없는 30대 직장인이다. 야근이랑 상사 눈치 보는 스킬은 만렙인데, 몬스터 잡는 스킬은 전혀 없단 말이다. 하다못해 등산용 스틱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손에 쥔 거라곤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빈 물병 하나가 전부였다.
【알림: 안전 구역 경계에서 몬스터의 접근이 차단되었습니다.】
"어?"
허탈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 그렇지. 안전 구역이라고 했잖아. 시스템이 괜히 안전이라는 단어를 쓴 게 아니었나 보다.
벽 너머로 뭔가 긁는 소리가 들렸다.
끄윽, 끄윽.
소름 돋는 소리였다. 마치 손톱으로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 같았다. 아니, 손톱이 아니라 뭔가 더 크고 단단한 것으로 긁는 느낌이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상상이 됐다. 커다란 발톱, 아니면 부리 같은 거.
하지만 벽은 뚫리지 않았다. 대신 시스템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알림: 몬스터가 안전 구역을 인식하지 못하고 배회 중입니다.】
배회라니, 그냥 헤매고 있다는 거잖아.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저 밖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여기서 계속 버틸 수는 없는데. 게다가 저놈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건가. 밤새도록 벽을 긁어댈 생각인가.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상황을 좀 더 정리해봐야 했다.
방 안을 다시 둘러봤다. 회색 콘크리트로 마감된 사각형 공간, 대략 서너 평쯤 되어 보였다. 아까 봤던 배급 서랍 옆에, 처음엔 못 봤던 작은 인터페이스 같은 게 벽면에 떠 있었다. 은은한 청록색 빛을 내는 사각형 창이었다.
【포인트 교환소】
오, 이건 좀 게임 같은데. 이럴 거면 튜토리얼이라도 좀 챙겨주지.
손을 대보니 화면 같은 게 펼쳐졌다.
【현재 보유 포인트: 0】
【교환 가능 항목: 없음】
역시 돈이 있어야 뭘 하지. 자본주의는 던전에서도 통용되는 모양이다.
"돈 없으면 굶어야 하는 건 여기도 똑같네."
혼잣말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회사에서도 실적 없으면 보너스 없다고 그러더니, 여기 와서도 똑같은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그때, 문득 아까 벽을 긁던 몬스터 생각이 났다. 만약 저걸 잡으면 포인트가 생긴다고 했었지. 그런데 안전 구역 안에서는 몬스터가 못 들어온다고 했으니, 잡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미쳤다.
지금 나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무기도 없이 어떤 몬스터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갔다가는 그대로 게임 오버였다. 이런 상황에서 용감하게 뛰쳐나가는 건 만화 주인공한테나 어울리는 짓이고, 나는 어제까지 엑셀 시트나 만지던 인간이다.
일단은 관찰이 먼저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봤다.
어두운 통로가 보였다. 습기 찬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흙과 이끼, 그리고 뭔가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래된 지하 주차장에 물이 새서 몇 달 방치된 것 같은, 그런 냄새였다.
저 멀리서 뭔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르렁.
등골이 오싹했다. 급하게 문을 다시 닫았다.
딸깍.
손잡이를 돌려 잠금장치를 걸었다.
이번엔 확실히 걸었다.
···확실히 걸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방 안쪽으로 돌아와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회사에서 임원 앞에 서서 발표할 때도 이 정도로 긴장하진 않았는데.
【알림: 셸터 유지 시간이 6일 23시간 남았습니다.】
뭐?
갑자기 뜬 알림에 눈이 커졌다.
유지 시간이라니, 이거 시한부라는 거잖아.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서둘러 시스템에게 물어봤다. 정확히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알림: 셸터는 포인트 없이 최대 7일간 유지됩니다.】
【7일 이후 포인트가 0일 경우, 셸터는 소멸합니다.】
소멸이라니.
그러니까 7일 안에 뭐라도 해서 포인트를 모으지 못하면, 이 안전지대가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밖에는 몬스터가 배회하고 있고.
와, 이거 완전 시한부 던전 라이프네.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의 냉기가 엉덩이를 통해 올라왔다. 이 와중에도 바닥 차갑다는 게 제일 먼저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정신을 좀 차려야 했다.
7일. 168시간. 대충 계산해보니 하루에 최소 몇 포인트는 벌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정확한 필요 포인트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알림: 셸터 유지에는 최소 1일당 10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오, 알려주네.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서늘한 정보를 이렇게 사무적으로 던지다니. 마치 회사 인사팀에서 "이번 달까지 실적 못 채우면 권고사직입니다"라고 문자 한 통 보내는 것 같은 무심함이었다.
70포인트를 7일 안에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어떻게 모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알림: 던전 내 폐기물을 회수하면 포인트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폐기물?
방 안을 다시 둘러봤다. 아까부터 눈에 걸리던 게 있었다. 처음 이 방이 생겼을 때, 바닥 한쪽에 콘크리트 부스러기와 흙덩이가 좀 굴러다니고 있었다.
혹시 저것도 되나.
조심스럽게 흙덩이 하나를 집어 인터페이스 근처에 갖다 댔다.
【알림: '잡석' 1개를 발견했습니다. 교환 가능 여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오오, 된다!
확인을 누르니 곧바로 결과가 나왔다.
【'잡석' 1개가 포인트 0.1로 환산되었습니다.】
···0.1이라니.
너무 짜다.
이래서는 700개를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흙덩이 700개를 언제 다 줍고 있냐. 이럴 거면 알바비를 더 후하게 쳐주든가, 시스템 이놈은 노동청 신고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실망감에 어깨가 축 처졌다.
하지만 방 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처음 낙하하면서 같이 떨어진 파편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마 지진 당시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함께 딸려온 모양이었다. 천장 구석에도, 배급 서랍 뒤쪽에도, 심지어 문틈 아래에도 자잘한 파편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나씩 주워서 인터페이스에 대봤다.
【'철근 조각' 발견. 포인트 3으로 환산되었습니다.】
오, 이건 좀 낫네.
【'콘크리트 덩어리' 발견. 포인트 1로 환산되었습니다.】
【'전선 뭉치' 발견. 포인트 5로 환산되었습니다.】
전선이 제일 값이 나가나 보다. 하긴 구리니까 그럴 만도 하다. 어쩐지 재활용센터 아저씨들이 전선을 그렇게 좋아하시더니, 여기서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파편을 주웠다. 손끝이 까지고 손톱 사이에 흙이 잔뜩 끼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지금은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매니큐어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배급 서랍 밑을 뒤지다가 작은 볼트 몇 개도 발견했다. 인터페이스에 대보니 각각 0.5포인트씩이었다. 짜긴 해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한 시간쯤 지나자, 방 안의 잔해는 거의 다 정리됐고 포인트는 34까지 올라갔다.
【현재 보유 포인트: 34】
70포인트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양이었지만, 그래도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는 법이었다. 첫 월급 받았을 때도 이렇게 뿌듯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흙덩이 몇 개 주웠다고 이렇게 감격하는 나 자신이 좀 웃겼다.
"이 정도면..."
혼잣말을 하며 인터페이스를 다시 열었다.
【교환 가능 항목】
【생수 1병 - 2포인트】
【건조식품 세트 - 5포인트】
【간이 침낭 - 15포인트】
【손전등 - 8포인트】
오, 이제 뭔가 살 수 있는 게 생겼다. 편의점 물건도 아니고 던전 물건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항목들이었다.
일단 침낭을 사기로 했다. 바닥이 너무 차가웠으니까. 잠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엉덩이가 얼어붙는 판에, 저기서 밤을 새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이 떨렸다.
결제, 아니 교환을 마치자 눈앞에 정말로 침낭이 나타났다. 두툼하고 따뜻해 보이는 은색 침낭이었다. 만져보니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운 재질이었다. 등산용품점에서 파는 고급 제품 같은 느낌이었다.
남은 포인트로 손전등도 하나 샀다. 11포인트가 남았다. 손전등은 묵직하고 단단했다. 스위치를 눌러보니 하얀 불빛이 쏟아졌다. 이게 있으니 그나마 사람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수도 살까 고민했지만, 남은 포인트로 뭘 더 사면 다음 폐기물 수거 때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은 참기로 했다. 아직 아까 마신 물병에 몇 모금 정도 남아있었으니까.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는 이 공간에서, 나는 침낭을 깔고 손전등을 옆에 두었다.
오늘 하루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지진, 추락, 던전셸터, 몬스터, 포인트, 그리고 시한부 생존.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상사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흙바닥에 침낭 깔고 앉아서 몬스터한테 안 잡혀 먹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니, 인생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눈이 자꾸 감겼다.
마지막으로 문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데.
생각은 했지만, 몸이 먼저 잠에 빠져들었다. 손전등 불빛이 천장을 향한 채 켜져 있었고, 벽 너머에서는 여전히 끄윽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이어졌지만, 그마저도 자장가처럼 아득해졌다.
···그날 밤, 문 손잡이가 아주 미세하게,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