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알림: 셸터 유지 시간이 4일 23시간 남았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문이었다.
빗장은 그대로 걸려 있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제 느낀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몸을 일으키며 관절을 하나씩 풀었다. 어깨가 뻐근했다. 며칠째 딱딱한 바닥에서 자다 보니 등짝이 아예 나무판자가 된 기분이었다.
일어나서 몸을 일으키는데,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배급 서랍이 살짝 열려 있었다.
분명 어젯밤에 닫아뒀는데.
서랍 손잡이 쪽으로 걸어가는 몇 걸음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서랍 안을 확인하니 물병 하나가 없어졌다.
【알림: 배급 물자 1개가 소실되었습니다.】
소실이라니.
"이거 진짜 뭐야."
혼자 중얼거리는데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문은 잠겨 있었고, 벽은 파괴 불가능한 재질이라고 했다. 그런데 물병이 사라졌다는 건, 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 누가 다녀갔다는 뜻인가.
서랍 안쪽을 손끝으로 더듬어봤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마치 처음부터 물병이 있었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딱 그 자리만 비어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했다.
【알림: 안전 구역 내 이상 징후가 3회 감지되었습니다.】
3회?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봤다.
첫 번째는 아마 그 발자국과 머리끈, 실 조각. 두 번째는 빗장이 어긋나 있던 것. 세 번째가 지금 이 물병 소실이었다.
뭔가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건 몬스터의 소행이 아니다.
몬스터라면 벌써 나를 공격했을 것이다. 발톱이든 이빨이든 뭐든 들이밀며 문짝을 뜯어냈겠지. 이렇게 조용히 물건 하나씩만 건드리는 건, 뭔가 다른 존재의 행동 방식이었다.
조심스럽게, 아니면 겁이 많거나.
혹은 나만큼이나 절박하거나.
일단 오늘은 더 확실한 대책이 필요했다.
인터페이스를 열어 다른 교환 항목을 찾아봤다. 화면을 스크롤하다 보니 별별 잡템들이 다 있었다. 방음 커튼, 벌레 퇴치 스프레이, 이빨에 좋다는 영양제까지. 지금 이 상황에 저런 게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교환 가능 항목】
【간이 알람 센서 - 20포인트】
알람 센서라면 딱 필요한 물건이었다.
【현재 보유 포인트: 45】
45에서 20을 쓰면 25가 남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아까웠지만, 안전이 우선이었다.
교환을 마치자 손바닥만 한 원형 장치가 나타났다. 표면이 매끈했고, 가운데 작은 렌즈 같은 게 박혀 있었다. 문 근처에 붙이면 움직임을 감지해서 소리를 낸다고 했다.
붙이기 전에 몇 번이고 위치를 바꿔봤다. 너무 낮으면 못 볼 것 같고, 너무 높으면 손이 안 닿을 것 같고.
결국 문 위쪽 모서리, 딱 눈높이보다 살짝 위에 붙였다.
【알림: 알람 센서가 설치되었습니다.】
좋아, 이제 뭔가가 문을 건드리면 바로 알 수 있겠지.
안심 반, 불안 반으로 하루를 보냈다.
남은 잔해가 없어서 더 이상 포인트를 벌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 결국 밖으로 나가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그 발자국의 주인이든 몬스터든 뭐든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고민하다가 결국 오늘은 그냥 방 안에서 버티기로 했다.
낮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라디오 주파수를 몇 번 더 돌려봤지만 여전히 잡음뿐이었다. 벽을 두드려봤지만 반응도 없었다. 배급 서랍을 몇 번이고 여닫으면서 안이 잘 닫히는지 확인했다.
이럴 때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시켜 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걸 알면서도 자꾸 떠올랐다. 이 상황에 배달 앱을 켜는 상상을 하는 내가 참 어이없었다.
* * *
밤이 됐다.
라디오는 여전히 잡음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지지직, 지지직.
침낭에 몸을 뉘이면서도, 오늘은 절대 깊게 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손전등도 머리맡에 두고, 배낭도 손이 닿는 거리에 뒀다. 만약 뭔가 일이 생기면 바로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하지만 몸은 정직했다. 며칠간 쌓인 피로가 결국 눈을 무겁게 만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삐이익.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번쩍 눈이 떠졌다.
알람 센서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관자놀이가 쿵쿵 울렸고,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손전등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는 속도가 너무 급해서 순간 어지러웠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주 조금, 사람 손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누구야!"
소리를 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목소리가 좁은 방 안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려 되돌아왔다.
손전등을 문틈 사이로 비췄다.
빛줄기가 통로 안으로 뻗어나갔다. 먼지 같은 게 그 빛 속에서 부유하는 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 뭔가 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작은 그림자였다. 사람의 형체가 맞았다.
키가 그리 크지 않았다. 어깨가 좁았고, 움직이는 방식이 어딘가 서툴렀다.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쫓아가야 하나, 아니면 그냥 문을 닫아버려야 하나.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밖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저 그림자 하나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나가는 순간 함정일 수도 있다.
고민하는 사이, 그림자는 이미 통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알림: 안전 구역 경계에서 미확인 존재가 이탈했습니다.】
미확인 존재라니, 시스템도 저게 뭔지 모른다는 뜻인가.
숨을 몰아쉬며 문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잠갔었는데, 빗장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아니, 이건 그냥 풀린 게 아니라, 누군가 밖에서 조작한 흔적이 있었다.
빗장 주변에 미세한 흠집이 나 있었다. 뭔가 얇고 뾰족한 걸로 긁은 것 같은 자국.
손전등을 가까이 대고 자국을 살펴봤다. 일정한 간격으로 긁힌 선들. 서두른 흔적도 아니었고, 능숙하게 반복한 흔적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건 그냥 우연히 안 잠긴 게 아니었다.
누군가, 혹은 뭔가가 의도적으로 이 문을 열려고 했던 거다.
"미친..."
손이 떨렸다.
다시 빗장을 걸고, 이번엔 침낭도 문 앞으로 옮겼다. 만약 또 열리려고 하면 내가 바로 알 수 있게.
침낭을 옮기면서 배낭도 같이 끌고 왔다. 최소한 자다가 발이라도 걸려서 눈이 뜨이게.
하지만 잠은 이미 다 깨버렸다.
손전등을 켠 채로 벽에 기대앉아 밤을 지새웠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으니 차가운 냉기가 그대로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몸을 웅크리고, 무릎 사이에 손전등을 끼운 채 눈만 문틈에 고정했다.
【알림: 셸터 유지 시간이 4일 12시간 남았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동이 트는 것 같지도 않은 이 공간에서, 나는 시스템 알림으로만 시간을 가늠하며 앉아 있었다.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저 그림자가 사람이라면, 왜 나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왜 물건만 조금씩 훔쳐 가는 걸까.
혹시 나를 관찰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저 살아남으려고 몰래 물자를 챙기는 또 다른 생존자인 건가.
만약 생존자라면, 왜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걸까. 왜 소리를 지르면 그렇게 빨리 도망치는 걸까.
겁이 많은 건가, 아니면 나를 경계하는 건가.
혹시 나보다 먼저 이 층에서 오래 버틴 누군가가, 이 방의 물자를 하나씩 확인하며 안전한지 시험해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나가자 오히려 조금 안도가 됐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통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어느 쪽이든, 이제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음에 저 그림자가 다시 나타나면, 이번엔 확실히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