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공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소이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청명공작가는 명색이 왕가와 사돈을 맺을 가문이었으니, 공작에게 이헌의 이상함을 보고하면 최소한 경계는 살 거라 여겼다. 소이는 이서연의 시중을 드는 틈틈이 정보를 정리했다. 근위대 창고 재고 불일치, 박소윤과의 밀회, 그리고 예지몽에서 본 서류 소각 장면.
세 가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 그림이 그려졌다. 누가 봐도 뒤가 구린 정황들이었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증거로 내밀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재고 불일치는 소이가 우연히 엿들은 근위대 병사들의 잡담에서 나온 것이었고, 밀회는 소이 자신이 밤중에 몰래 뒤를 밟아 본 것이었으며, 서류 소각은 꿈속에서 본 장면이었다. 즉, 증언할 수 있는 사람도, 손에 쥐고 흔들 물건도 없었다. 있는 건 소이의 확신뿐이었고, 그 확신은 남들 눈에는 그냥 허무맹랑한 소리로 보일 게 뻔했다.
그래도 일단 부딪쳐 봐야 했다. 소이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곡물 창고 수치가 이상하다고?"
청명공작의 집사장은 미간을 좁히며 소이를 바라봤다. 소이가 슬쩍 흘린 정보에 반응한 것이었다.
"예. 지난달 입고량과 실제 재고가 맞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냐."
"소문입니다."
집사장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소이는 그 눈빛만으로도 이미 게임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문으로 근위대장을 걸고넘어질 셈이냐."
집사장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경고였다. 소이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그냥 밀어붙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왕가의 인물을, 그것도 근위대 전체를 낀 조직을 상대로 소문 몇 마디로 움직일 어른은 없었다.
"소문이라도 확인해 보실 가치는 있지 않겠습니까."
소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밀어붙여 보았다. 그러나 집사장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확인은 우리 몫이지, 시녀가 정할 게 아니다. 앞으로 이런 소리 함부로 옮기고 다니지 마라. 자칫하면 네 목이 먼저 날아갈 수도 있어."
목이 날아간다는 말이 은근한 협박인지 아니면 진심 어린 걱정인지, 소이는 구분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결론은 같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잘못 들었나 봅니다."
결국 소이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
방으로 돌아온 소이는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증거가 필요해.'
예지몽만으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문 정도로는 오히려 소이가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뿐이었다. 필요한 건 실제로 손에 잡히는 무언가였다. 서류, 증인, 아니면 눈으로 직접 본 사실.
그리고 그런 걸 구하려면, 시녀의 신분으로는 갈 수 없는 곳에 가야 했다.
애초에 시녀가 근위대장의 뒷조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였다. 정문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뒷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소이는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옷장 안쪽 상자를 다시 떠올렸다. 검은 단검. 그리고 그 단검과 함께 있던, 낡은 종이 한 장.
상자를 열자 곰팡내와 함께 익숙한 냄새가 올라왔다. 오래 묵은 가죽 냄새였다. 소이는 종이를 조심스레 펼쳤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종이에는 도성 뒷골목의 지도 한 조각과,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적힌 이름 하나가 있었다.
'쥐돌이.'
이름 옆에는 작게 그려 놓은 쥐 그림도 있었다. 성의 없이 휙휙 그린 낙서 같았지만, 어딘가 애정이 담긴 손길이기도 했다.
예전에 알던 정보상이었다. 소이가 지금의 삶을 살기 전, 아주 다른 세계에서 스치듯 알게 된 인물.
'살아 있으려나.'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다. 소이가 알던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지금 이 세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손에 쥔 이 지도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마치 두 세계가 어딘가에서 겹쳐 있는 것처럼.
***
다음 날, 소이는 휴무를 얻었다.
"오랜만이네, 소이야. 어디 다녀올 데가 있어?"
이서연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늘 그렇듯 순수하고 걱정 없는 얼굴이었다.
소이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친척 집에 다녀오려고요."
거짓말이었다. 소이에게는 친척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서연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필요한 거 있으면 마차 불러줄까?"
"괜찮습니다. 걸어가려고요."
마차라니, 뒷골목까지 공작가 마차를 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이는 손을 내저으며 얼른 방을 나섰다. 그 순진함이 소이에게는 늘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이서연은 자신을 향한 거짓말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도성을 벗어나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소이는 시녀복 위에 낡은 외투를 덧입었다. 걸음걸이도 달라졌다. 반듯하게 등을 세우던 걸음이, 어깨를 살짝 늘어뜨린 채 주변을 살피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눈동자도 쉴 새 없이 좌우를 훑었다. 뒷골목이라는 곳은 시선을 잘 두는 것부터가 생존의 기본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
지도에 표시된 골목 끝에는 낡은 술집 하나가 있었다. 간판도 없이 문 위에 쥐 모양의 나무 조각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 조각마저 색이 다 벗겨져서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소이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구석 자리에 앉아 카드를 만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마른 체형에 눈매가 유난히 가늘어 별명값을 제대로 하는 인상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카드를 능숙하게 넘기는 모습이, 딱 봐도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은 인물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소이는 곧장 그쪽으로 걸어갔다. 주변 몇몇이 흘깃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쥐돌이."
소이가 낮게 부르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무표정하던 얼굴이 소이를 알아본 순간 살짝 굳었다. 카드를 쥔 손이 그대로 멈췄다.
"...너 살아 있었냐."
그 한마디에 담긴 놀라움이 심상치 않았다. 소이는 그 반응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뭐지, 저 표정.'
반가움보다는 경악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걸 본 것처럼.
쥐돌이는 카드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서더니 다시 주저앉았다. 눈은 여전히 소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너... 진짜 너 맞아?"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던지는 걸 보니, 이건 단순히 오랜만에 만나서 놀란 정도의 반응이 아니었다. 소이는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 뭘 알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