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몸이 움직였다는 건 착각이었다. 정확히는, 몸이 굳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발끝부터 목덜미까지 감각이 사라졌다. 눈만 겨우 뜬 채로 서 있는 꼴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명령이 떠올랐지만, 그 명령을 다리로 내려보내는 회선이 끊긴 것 같았다.
"소원!"
외침만 협곡에 흩어졌다.
내 목소리는 컸는데, 정작 그 목소리를 낸 몸은 여전히 못 박힌 듯 그대로였다. 이게 말이 되나. 몸 따로, 목소리 따로 움직이는 게 가능한 건가.
마수의 앞발이 다시 떨어졌다.
콰앙!
땅이 울리는 진동이 발밑까지 전해졌다. 협곡 벽에 붙은 이끼가 후드득 떨어졌다.
소원이 겨우 옆으로 굴러 피했다.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먼지 속에서 그녀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살아있다. 일단 살아있다. 그것만으로 숨이 트였다.
"대장, 후방 지원!"
순찰대장이 소리쳤다. 남은 병사들이 창을 세웠다.
다섯이 한꺼번에 찔러 넣었다.
서걱, 서걱, 서걱.
창끝이 마수의 가죽에 튕겨나갔다. 상처는 나지 않았다.
가죽이 아니라 갑주 같았다. 창날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이상하게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저게 살가죽이라고? 저건 그냥 벽이잖아.
"안 통합니다!"
병사 하나가 절규했다.
마수의 꼬리가 휘둘러졌다.
퍼억!
두 명이 그대로 날아갔다.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떨어진 두 사람의 몸이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눈을 돌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시선이 거기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게 사람의 몸이 접히는 모양이 맞나.
속이 뒤틀렸다. 이건 예상 밖이다. 원작 지식에서 이 마수는 튜토리얼 난이도 재조정 대상이었지, 이렇게 압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게임 화면 속에서는 초반 몇 시간 안에 잡는 잡몹 취급이었다. 패턴도 세 가지뿐이었고, 유저 하나가 솔플로도 잡던 놈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게임 속 밸런스였을 뿐이고, 현실은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는 걸지도 모른다.
여기는 숫자로 조정되는 세계가 아니다. 그 사실을 이렇게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영주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대장이 다급히 외쳤다.
지시. 내가 무슨 지시를 내려야 하나.
머릿속이 새하얗다.
영주라는 직함이 붙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답을 원한다는 것. 그런데 정작 나는 답을 가진 적이 없었다는 것.
소원이 다시 일어섰다. 입가에 피가 흘렀다.
"저놈, 뒷다리 쪽에 상처가 있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말했다.
"뭐?"
"아까 나무에 걸렸는지, 뒷다리 하나가 절뚝입니다."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 상황에서도 저걸 보고 있었다니. 검을 쥔 손으로 피를 닦아내면서도 시선은 마수의 다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임 속 지식이 다시 떠올랐다. 흑안의 마수는 정면 방어력이 극단적으로 높지만, 다리 관절은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였다.
이론상으론 알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확인된 건 처음이었다.
공략 게시판에서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가듯 읽었던 문장이었다. "정면은 포기하고 관절을 노려라." 그때는 그냥 텍스트였다. 지금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지시였다.
"뒷다리 관절을 노려라!"
소리쳤다.
"전부 오른쪽 뒷다리로!"
대장이 병사들을 재편했다. 남은 넷이 오른쪽으로 우회했다.
마수가 몸을 틀며 포효했다.
크르르릉!
땅을 딛고 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소리는 그냥 소리가 아니라 압력 같았다. 공기가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소원이 그 틈을 타 몸을 낮췄다.
"이번엔 확실히."
중얼거리며 검을 고쳐 쥐었다.
낮은 자세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 몸놀림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아니, 있었을 텐데 그걸 눌러 삼킨 것처럼 보였다.
마수의 뒷다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검이 관절 사이에 박혔다.
마수가 처음으로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크아아악!
그 소리는 지금까지 들었던 포효와 달랐다. 아파서 내는 소리였다. 저것도 아플 수 있다는 걸, 이제야 확인했다.
"먹혔다!"
병사 하나가 외쳤다.
그 순간이 방심이었다.
마수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옆으로 쓰러졌고, 그 거체가 병사 둘을 그대로 덮쳤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비명은 없었다.
너무 순식간이었다. 방금까지 창을 세우고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안 돼."
숨이 막혔다.
순식간에 다섯 중 셋이 사라졌다.
숫자로 세는 게 이렇게 잔인한 일인 줄 몰랐다. 다섯, 셋. 그 사이에 있던 사람들의 이름도, 얼굴도 다 기억나는데.
소원이 다리에서 검을 뽑아냈다. 마수는 상처를 입고도 여전히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영주님, 이대로면 전멸입니다!"
대장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실렸다.
그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창을 쥔 손이 떨리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순간 게임 속 마지막 정보 한 조각이 떠올랐다. 흑안의 마수는 상처를 입으면 일정 시간 광폭화한다. 그 뒤엔 오히려 움직임이 단순해진다.
공략글의 한 줄이었다. "광폭화 구간만 버티면 클리어 확정." 댓글도 몇 개 붙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웃으면서 스크롤을 넘겼다. 지금은 웃을 여유가 없다.
"버텨! 곧 놈이 미쳐 날뛴다! 그다음에 관절을 다시 노려!"
"버티라니, 어떻게!"
대장이 되받아쳤다. 당연한 반문이었다. 버티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들리는지,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소원이 위험하다. 남으면 전멸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가가 크다.
선택은 내 몫이었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경우를 굴려봤다. 병사들을 먼저 물리고 소원과 나만 남는 경우, 전원이 후퇴하는 경우, 지금 이대로 밀어붙이는 경우. 어느 것도 확실한 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미끼가 된다."
입에서 나온 말에 나조차 놀랐다.
"영주님!"
소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두려움 비슷한 게 보였다. 지금까지 마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얼굴이었다.
"소원, 관절 준비해. 신호하면 들어가라."
대답을 듣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흙바닥에 발이 닿는 느낌조차 이상하게 낯설었다. 이게 내 다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참는 것뿐이었다.
마수의 눈이 나를 향했다.
검은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그 눈이 나를 오롯이 목표로 잡은 순간, 협곡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