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용사 키우는 악역 영주

3화

협곡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말발굽이 자갈을 밟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골짜기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바람은 이상하게 비린내를 품고 있었다. 피 냄새인지, 짐승의 체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소원은 내 옆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빛만 앞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등을 곧게 세운 자세, 안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저 여자는 원래 저렇게 말이 없는 편이었나. 아니, 평소라면 나를 놀리는 말 한마디쯤은 던졌을 텐데. "싸움에 나서기 전에 알아둘 게 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뭡니까."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이미 각오를 하고 있는 듯한 어조였다. "마물은 종류마다 약점이 다르다. 몸통 정면을 노리지 말고, 뒷다리 관절을 봐야 해." 소원의 눈에 의문이 스쳤다. 말을 세우려는 듯 잠깐 고삐를 당겼다가 다시 놓았다. "그런 건 어떻게 아십니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게임에서 봤다고 할 순 없으니. "경험이다." 짧게 넘겼다. 소원은 더 묻지 않았지만, 완전히 믿는 눈빛도 아니었다. 옆얼굴로 나를 한 번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뭘 감추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앞만 보고 말을 몰았다. 협곡 입구에 도착하자 이미 순찰병 다섯이 진을 치고 있었다. 창을 쥔 손들이 모두 굳어 있었다. 창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훈련된 병사들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이미 뭔가를 봤다는 뜻이었다. "영주님, 이쪽입니다." 대장이 안내한 곳에는 부서진 나무와 깊게 파인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혀 옆으로 쓰러져 있었고, 껍질이 통째로 뜯겨나간 자리에서 진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발자국은 한 걸음의 폭이 성인 몸통만 했다. 발톱이 파고든 흔적까지 선명했다. "이 정도 크기라면..." 말을 잇지 못했다. 게임 속 기억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흑안(黑眼)의 마수. 중급 몬스터 웨이브를 이끄는 선봉. 원작에서도 초반 플레이어들이 감당하지 못해 튜토리얼 난이도를 재조정해야 했던 상대였다. 커뮤니티에서 그 마수 하나 때문에 게임을 접었다는 글을 몇 개나 봤는지 모른다. 레벨 제한을 걸어놓고도 파티 전체가 몰살당했다는 후기가 넘쳤다. 숨이 막혔다.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절대 무리다. 순찰병 다섯, 소원, 그리고 나. 셀 것도 없이 답이 나왔다. "철수해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대장이 눈을 크게 떴다. "영주님, 사냥꾼 셋이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은 낮다." 차갑게 들렸겠지만 사실이었다. 게임에서 그 마수의 손에 잡힌 인간은 살아남지 못했다. 데이터베이스에 적힌 처치 로그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즉사, 즉사, 즉사. 예외는 없었다. 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창을 쥔 손에 핏줄이 섰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 "만약은 없다. 지금 여기서 더 지체하면 우리도 같은 꼴이 된다." 말하면서도 속이 뒤틀렸다. 사냥꾼 셋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저 게임 속 확률표로만 그들의 운명을 판단하고 있다는 게,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물음을 자꾸 밀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 감정에 휘둘리면 더 큰 걸 잃는다. 그때 협곡 안쪽에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앙! 모두가 굳었다. 순찰병 하나가 창을 놓칠 뻔하고는 황급히 다시 잡았다. 다시. 콰앙! 땅이 흔들렸다. 발밑의 흙이 미세하게 튀어 올랐다. "온다." 소원이 검을 뽑았다. 손목의 떨림이 검신을 따라 미세하게 번졌다. 협곡 안쪽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붉은 안개 같은 것이 그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안개는 숨을 쉴 때마다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이 열렸다. 검은 눈동자 두 개. 동공이랄 것도 없이 그냥 온통 검은, 빛을 삼키는 눈이었다. 흑안의 마수였다. "저게 뭡니까." 소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 보는 두려움이었다. 저 여자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알 필요 없다. 지금은 도망친다." "사냥꾼들은..." "소원, 지금은 안 돼." 말하는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마수가 포효했다. 크르르릉! 지축이 울렸다. 순찰병들이 무기를 놓칠 뻔했다. 말들이 미친 듯이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놈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검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그리고 소원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시선이었다. 발자국이 협곡 바닥을 짓이기며 다가온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걸음마다 땅이 울렸다. 심장이 그 진동에 맞춰 뛰는 것 같았다. "전열, 후퇴!" 대장이 외쳤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의 발이 엉켰다. 도망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 순간 마수의 앞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서걱! 선두에 있던 병사 하나가 그대로 튕겨나갔다. 몸이 접힌 채로 나무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다. 비명은 짧았다. "이런..." 숨이 턱 막혔다. 원작에서 알던 강함과, 눈앞에서 마주한 강함은 완전히 다른 무게였다. 텍스트로 읽는 로그와, 눈앞에서 피가 튀는 광경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소원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소원, 안 돼!" 외쳤지만 늦었다. 그녀의 검이 마수의 앞발을 향해 뻗어갔다. 몸을 낮추고 파고드는 자세, 배운 대로의 정석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정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카앙! 금속음이 협곡을 갈랐다. 소원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검이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바닥에 꽂혔다. "쿨럭!"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어깨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아니, 계획이라 부를 만한 게 처음부터 없었다. 애초에 이 정도 상대와 맞선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 마수의 눈이 소원을 향했다. 검은 눈동자에 붉은 안개가 스치듯 감돌았다. 다음 공격이 그녀를 향할 거라는 걸 직감했다. 발톱이 다시 들리는 게 느껴졌다. 저 발톱이 한 번 더 그어지면, 소원은 방금 죽은 병사와 같은 자리에 눕게 될 것이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