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하령의 방위, 네가 맡아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집무실 안에는 벽난로 장작 타는 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
나는 서류를 내려다봤다. 인장이 찍힌 임명장이었다. 붉은 밀랍 위에 뒤틀린 뿔 모양이 도장처럼 박혀 있었다.
"제가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되묻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 말고 누가 있느냐."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에는 기대도, 의심도 없었다. 그냥 사실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형은 왕도에 있고, 숙부는 병상에 누워 있다. 남은 건 나뿐이었다. 서른일곱 먹은 둘째 아들, 실권 없는 이름뿐인 귀족. 영지 회의에 얼굴 한 번 비추면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그런 자리였다.
"준비가 안 됐습니다."
"준비는 하면서 하는 거다."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나는 안다. 청하백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명령을 내리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문이 닫혔다.
집무실에 혼자 남았다. 창밖으로 청하령의 산줄기가 보였다. 늦가을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린다. 나무들은 이미 반쯤 벗어놓은 옷처럼 잎을 떨구고 있었다.
임명장을 다시 들었다. 손에 쥔 종이가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인장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뒤틀린 뿔 모양의 마물 문장. 청하백가의 오래된 상징이라고 배웠다. 어릴 때 가정교사가 지나가듯 알려준 이야기였다. 왜 하필 마물의 뿔을 문장으로 삼았는지는 아무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으윽."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손끝이 책상 모서리를 짚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쏟아졌다.
기억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밤들. 컵라면 냄새. 밤을 새워 클리어했던 게임 하나. 제목은 흐릿했지만 그 서사는 선명했다. 청하령, 월하촌, 강욕의 마왕. 그리고 이도현.
악역 귀족 이도현.
게임 속에서 그는 마왕과 내통해 영지를 팔아넘기고, 결국 성장한 용사에게 처단당하는 조연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지금 이 몸과 같았다.
"말도 안 돼."
혼잣말이 갈라져 나왔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걸 억지로 붙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이게 꿈인가 싶어서 뺨을 세게 꼬집어봤다. 아팠다. 아프면 꿈이 아니라는 건 누가 정한 규칙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규칙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용사의 이름도 기억났다. 월하촌 출신, 조부와 사는 소녀. 겉모습은 소년 같지만 분명한 여자아이였다. 윤소원.
게임에서 그 아이는 마물 토벌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 이도현의 배신을 알아채고 검을 들었다.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봤는지 모른다. 이도현이 무너지는 장면, 검을 맞고 뒷걸음질치는 장면, 마지막으로 남긴 대사까지. 그 대사가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결말만 남았다. 죽는다는 것.
결말은 하나였다. 이도현의 죽음.
숨을 몰아쉬었다. 속이 뒤틀린다. 이게 현실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이입할 새도 없이 배정받은 몸, 이입할 새도 없이 배정받은 죽음.
이게 뭔가 싶다. 억울해할 시간도 아까운데, 억울하다.
두통이 가라앉자 머릿속에 낯선 문구가 떠올랐다.
[상태 확인이 가능합니다.]
놀랄 힘도 없었다. 그냥 눌러봤다.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열렸다.
이름: 이도현.
나이: 37.
소속: 청하백가.
그 아래로 텅 빈 항목들이 늘어서 있었다. 스킬 없음. 특기 없음. 체력, 마력, 그 어떤 수치도 없이 그냥 텅. 딱 하나, '지식: 세계선(단편)'이라는 항목만 흐리게 빛나고 있었다.
손끝으로 그 항목을 눌러봤다. 반응이 없었다. 더 자세한 설명도, 부연도 없이 그냥 그 문구만 떠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게임을 알아. 하지만 세부는 모른다. 결말만 알고, 과정은 텅 비어 있다.
그게 더 무섭다.
결말은 정해져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은 안 보인다는 것. 지도 없이 절벽 끝으로 걸어가는 셈이다. 절벽이 있다는 건 아는데, 몇 걸음 남았는지는 모른다.
창을 닫았다. 사라지는 방식도 소리 없이 부드러웠다. 손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영주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집사의 목소리였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나는 하마터면 대답을 놓칠 뻔했다. 영주님, 이라는 호칭이 아직 낯설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은빛 봉투가 놓였다. 집사는 은쟁반 위에 그것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렸다. 나이 든 얼굴에 별다른 표정은 없었지만, 손끝이 살짝 긴장돼 있는 게 보였다.
"봉인이 낯섭니다. 순찰대가 국경 근처에서 발견했다더군요."
봉인에 낯선 문장이 찍혀 있었다. 뿔 달린 눈동자. 방금 본 청하백가의 문장과 닮았지만 조금 더 사악하게 뒤틀려 있었다. 뿔은 더 길었고, 그 아래 새겨진 눈은 마치 이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누가 보낸 거지?"
"경계 순찰대가 발견했습니다. 수취인은 영주님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어?"
"예. 정확히 '청하령의 새 영주'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새 영주. 그 표현이 걸렸다. 아직 정식 발표도 나지 않은 자리였다. 오늘 아침에야 아버지 입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런데 이 봉투는 마치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 도착했다.
"발견한 곳이 정확히 어디지?"
"국경에서 반나절 거리. 마물 서식지와 가까운 지역입니다."
집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순찰대장은 발견 당시 주변에 아무 흔적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마치 저절로 놓여 있던 것처럼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절로 놓여 있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갔다. 인편으로 온 게 아니라는 것. 사람이 아닌 것이 두고 갔다는 것.
"알겠다. 물러가도 좋아."
집사가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조용했다.
혼자 남아 봉투를 내려다봤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게임 속 기억에서 이 문장을 본 적이 있다. 흐릿하지만 분명했다. 화면 한구석, 이벤트 창이 뜰 때마다 떠오르던 문양.
강욕의 마왕.
이 세계의 최종 보스. 청하령을 집어삼키고, 이도현을 도구로 쓰고, 결국 용사에게 쓰러지는 그 존재. 그게 나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는 소리인가.
뜯어야 하나, 태워야 하나.
벽난로 쪽을 잠깐 봤다. 불 속에 던져 넣으면 이 불안한 예감도 같이 타버릴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야 할 걸 미룬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봉투를 태운다고 해서 마왕이 나를 잊어주는 것도 아닐 테고.
손톱으로 봉인을 갈랐다.
서걱.
종이가 갈라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 안이 너무 조용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그만큼 긴장해서였을까.
펼친 순간, 첫 줄이 눈에 박혔다.
"청하령의 주인에게."
그 아래로 이어지는 문장들이 눈에 익은 필체로 흘러갔다. 낯선 필체인데, 이상하게 눈에 익다는 느낌이 든다.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확신할 수 없는 익숙함.
읍읍, 하고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마왕이 나를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까지.
편지 아래쪽,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손에 든 종이를 놓칠 뻔했다. 활자 하나하나가 마치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도현.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네 결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