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용사 키우는 악역 영주

2화

편지의 첫 문단을 읽는 데 한참이 걸렸다. 손이 떨려서가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종이는 값싼 재질이었고, 글씨는 오히려 정갈했다. 마치 협박이 아니라 사무적인 통지문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대의 결말을 안다." 마왕은 그렇게 썼다. "거스르지 말고 손을 잡으라. 그러면 그 결말을 지워주겠다." 아래로는 조건이 이어졌다. 두 달의 시한. 청하령 경계의 방비를 열어둘 것. 그 대가로 목숨을 보장한다는 문장. 문장 끝에는 서명 대신 낙인 같은 인장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읽고, 다시 읽었다. 세 번째로 읽었을 때는 손끝이 종이를 구기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실소였다. "내 죽음을 미리 알고 있으니까 협박이 되는 거지." 혼잣말이 방 안에 흩어졌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잣말을 하는 버릇은 이 몸에 들어온 뒤로 부쩍 늘었다. 편지를 촛불에 가까이 가져갔다가, 도로 거둬들였다. 태워버리면 편했겠지만, 증거를 없애버리는 건 나중에 더 큰 손해가 될지 몰랐다. 편지를 서랍에 넣고 잠갔다. 아직은 아무에게도 보일 게 아니었다. 이제 확실해진 게 하나 있다. 결말을 바꾸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은 이미 두 달로 정해졌다. 게임 속에서 이 시점 이후 벌어지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떠올려봤다. 갈래는 여러 개였지만, 결말의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도현은 죽는다. 마왕에게 손을 내밀든, 거부하든. 그리고 그 결말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하나뿐이었다. 윤소원. 게임 속에서 그 이름이 등장하는 장면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등장할 때마다 판을 뒤집는 인물이었다. 마왕의 계략을 무력화시키는 유일한 변수. 그 변수를 손에 넣지 못하면, 나는 시나리오가 정해놓은 죽음을 그대로 걸어가야 한다. 다음 날 새벽에 마차를 준비시켰다. 시종이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월하촌은 청하령 북쪽 산자락에 붙은 작은 마을이었다. 말을 몰고 반나절을 달려야 닿는 거리였다. 길은 갈수록 좁아지고 험해졌고,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몸이 들썩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청하령 성벽 안과는 전혀 달랐다. 논밭 대신 돌투성이 산비탈이었고, 지붕은 대부분 짚으로 엮은 것들이었다. 가는 내내 게임 속 기억을 되짚었다. 윤소원. 조부와 함께 살며, 마물 토벌로 마을을 지켜온 소녀. 나이는 어렸지만 실력은 정식 기사단원 못지않다고 알려져 있었다. 성격은 무뚝뚝하고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고. 직접 만나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구경했다. 영주 문장을 새긴 마차는 이곳에서 낯선 물건이었다. 몇몇은 손가락으로 마차를 가리키며 소리쳤고, 몇몇은 겁먹은 얼굴로 부모 뒤에 숨었다. 마부가 속도를 줄이며 조심스럽게 길을 갈랐다. 조부의 집은 마을 끝, 낡은 초가였다. 지붕 한쪽이 살짝 내려앉아 있었고, 마당에는 장작더미가 쌓여 있었다. 마당에서 나뭇단을 패던 사람이 있었다. 체구가 작고, 짙은 머리를 짧게 자른 아이. 소년처럼 보였지만, 게임 속 기억이 알려주는 이름은 명확했다. 도끼를 쥔 손목이 얇았지만, 내려찍는 동작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무토막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며 튀어 올랐다. 윤소원. 마차가 멈추자 그 애가 도끼질을 멈추고 이쪽을 봤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거기, 뭘 그렇게 보십니까."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청하령의 방위를 맡은 이도현이라 한다." "영주님이 여기까지 왜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도끼를 내려놓지도 않은 채였다. 도끼날에 아직 나무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저는 할 얘기 없습니다." 핑퐁처럼 짧게 되받아치는 말투가 게임 속 대사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성격까지 이렇게 그대로 옮겨올 줄은 몰랐는데. "마물 토벌 실력이 좋다고 들었다." "소문이 과장됐을 뿐입니다."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아." 소원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작년 겨울, 협곡 근처에서 3등급 마물을 혼자 잡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사실이겠지."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부정보다 더 확실한 인정이었다. "내 밑에서 훈련받아라. 정식으로 검을 배우고, 청하령의 방위대로 편입될 기회를 주겠다." "왜 갑자기." 소원이 도끼를 내려놨다. 경계심이 짙게 남은 목소리였다. "청하령 경계가 심상치 않다. 사람이 필요해." 반쪼가리 사실이었다. 나머지 반은 아직 말할 수 없었다. 마왕의 편지 이야기를 여기서 꺼낼 수는 없었다. 아직 이 아이가 나를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 "영주님 밑에는 이미 기사단이 있지 않습니까." "기사단으로는 부족한 일이 생길 거다." "근거 없는 말을 잘 하시네요." "근거는 나중에 보여주지." 소원이 팔짱을 꼈다.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이었지만, 완전히 거절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집 안에서 노인이 나왔다. 소원의 조부였다. 지팡이를 짚은 손이 떨렸다. 걸음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영주님이 손녀에게 무슨 볼일이오." "제자로 삼고 싶습니다." 노인이 오래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경계와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이 아이는 검을 놓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말려도 안 될 아입니다." 소원이 노인을 향해 눈을 흘겼다. 조손 간의 익숙한 실랑이처럼 보였다. "할아버지, 그런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 두 사람이 잠깐 옥신각신하는 사이, 나는 마당을 둘러봤다. 살림은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지붕 아래 매달린 마른 약초 다발과 부엌 앞에 쌓인 빈 항아리들이 그 살림을 짐작하게 했다. 이 아이를 데려가는 건 단순히 능력 좋은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소원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오래 생각하지 마라. 시간이 많지 않아." 내 말에 소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입니까."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두 달이라는 시한을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었다. 그때 말을 타고 온 순찰대원 하나가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말은 거품을 물었고, 대원의 옷자락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영주님! 경계 초소에서 급보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그가 외쳤다. "북쪽 협곡에서 마물 떼가 이상 행동을 보인다고 합니다. 사냥꾼 셋이 실종됐습니다." 소원의 표정이 굳었다. "실종이라니, 그 협곡은 낮은 등급 마물들뿐인데." "그게, 발자국이... 사람만한 크기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대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물통을 받아 벌컥벌컥 마신 뒤에도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초소장님이 즉시 영주님께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정찰대가 협곡 안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뭔가... 뭔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게임 속 기억을 더듬었다. 두 달 시한, 강욕의 마왕, 경계에서의 첫 이상 징후. 시나리오상 마왕이 보낸 척후 마물이 처음 나타나는 장소가 정확히 이 협곡이었다. 순서가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빠르다. 아직 준비된 게 하나도 없는데.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초소 병력으로는 부족하다. 기사단을 부르기엔 거리가 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전력 중 가장 쓸 만한 건 하나뿐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말이 튀어나온 뒤에야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이 판단이 옳은 건지 확신도 없이, 몸이 먼저 말을 내뱉고 있었다. 소원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서 방금까지의 경계심이 사라지고 다른 것이 떠올랐다. "저도 갑니다." "안 된다. 아직 정식으로 편입된 것도 아닌데." "제 구역입니다. 사냥꾼들도 제가 아는 사람들이고요." 조부가 말리려 했다. "소원아, 영주님 일에 함부로." "할아버지, 이번엔 안 됩니다." 소원은 이미 검을 챙기고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매는 손동작이 빠르고 능숙했다. 방금 전까지 도끼를 쥐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말릴 시간도, 이유도 부족했다. 협곡까지 거리를 계산하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늦지 않는다. 생각할 틈도 없이, 일은 이미 굴러가기 시작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